한남이고 페미니즘이고 누군가의 해맑은 웃음을 이길 수는 없지 않나
이따금 만나 커피를 마시곤 하는 호감 있는 남자와 지난밤 늦은 산책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차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바닷가 길을 걷는데 그 사람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그 사람은 거의 다 마신 아메리카노 잔을 나에게 맡기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십 여분 통화를 하고 와서는 연신 미안해했다. 그리곤 이것 때문에 전여친이랑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오늘은 일처리를 많이 하고 와서 이 정도고 원래는 더 많이 해요. 영화관에서 영화보다 몇 번이나 나갔다 들어오고... 그러니까 평소에 전화 연결이 잘 안 되는 정도? 제가 항상 통화 중이어서. 제 잘못이고 할 말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는 것도 길게 보면 본인이 나랑 결혼했을 때 그러니까 내 와이프랑 잘 살자고, 좋게 보면 와이프 일 안 하게 해주려고,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도 있는 건데 말이에요, 왜 그걸 이해를 못 하지, 싶긴 한 거예요. 좀 억울하죠. 그래서 저는 제가 일 많이 하는 거 이해해주는 사람 만나면 결혼할 거예요. 12시 반에 퇴근하고 집에 가서 와이프랑 야식 먹는 게 제 로망이에요.
아, 네, 그러시구나.
그는 연신 입을 내밀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또 어처구니없이 해맑게 웃었다. 나는 사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머, 저는 일 바쁘게 하시는 건 전혀 상관없어요, 아시다시피 저도 자영업을 해서 그런 건 다 이해를 한다고 말하고 싶기까지 했다. 그가 입고 있던 딱 벌어진 어깨에 딱 맞는 아이보리색 후리스 상의의 그 보드라운 면면을 자꾸 만지작 거리고 싶었기 때문에, 혹은 그의 키가 딱 내 머리 하나보다 조금 더 커서 산책하다가 그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는 기분이 꽤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아까 저 여기 방파제에 올라가 보고 싶은데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어서 참는다는 내 농담에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재밌었다는 그의 말과 그 세상 다 얻은 듯한 밝은 표정이 계속 떠올라서이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몇 시간이고 나눈 대화 중에 결국 남는 것은 겨우 몇 마디일 때. 그리고 그 부대낌이 꽤나 오래가는 경험. 그와 헤어지고도 그의 결혼 타령은 이상하게 목에 걸린 약 조각처럼 목구멍에 남아 새벽 늦게까지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여성의 역할을 주부, 아내, 내 아이의 엄마로 한정해 놓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낳고 자신의 늦은 퇴근길을 반겨주길 바라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한남이었다. 그의 결혼은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 이미 그려져 있었고 그 그림에는 여성의 자아, 욕망 등이 들어간 의견 따위가 덧칠될 부분은 없어 보였다. 나는 짧은 대화 속에 그런 것들을 감지하고 속이 매우 불편했지만 후리스와 머리 높이 따위에 내 영혼을 팔아넘기면서 그와 즐거운 시간을 깔깔거리며 보내고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한남이고 페미니즘이고 누군가의 해맑은 웃음을 이길 수는 없지 않나. 친구들은 아주 쉽게 그런 한남 버리라고 말을 했지만 나로서는 그의 맑고 행복한 표정이 자꾸 떠올라 그의 연락을 자꾸만 기다리게 되었다.
새벽녘까지 잠이 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4시간도 자지 못하고 다시 잠이 깼다. 이번에 드는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가 비록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또 밤늦게 산책도 한 사이지만, 꾸준히 연락을 한 적도 없고 서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식의 표현도 한 적이 없다.(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지?) 그러니까 나는 그의 후리스와 머리 높이 따위가 꽤 마음에 들지만 그는 나의 무엇이 마음에 드는지, 내가 예쁘게 보이긴 하는지, 그가 대체 왜 이따금 연락을 해서 인생 고민 같은 걸 털어놓는지, 전여친 얘기나 결혼 이야기는 왜 하는 건지 나로서는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한남 따위 만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걸 내가 결정하긴 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니까 결국 그가 가부장적인 한남이든 아니든 나로서는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있을 수도 있고, 근데 왜 나한테 연락을 하는 거야? 하, 근데 젊고 예쁜 놈이 왜 가부장적이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워 나는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고 말았다.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글을 썼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 시작이 저절로 되는 글,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글. 죽을 것 같아서는 아니지만, 아니지, 잠을 자지 못하면 결국 죽으니까, 죽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머릿속에 아예 집중을 해서 생각을 정리해서 언어화하고 그것을 나열해 버리고 나면 머릿속이 한결 조용해지고 드디어 나는 잘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시 죽음에 다가가는 글이라고 생각하기에 내 글은 다소 가볍고 즐겁다.
나의 글은 어떤 진실로 나를 데려가 줄까? 단순히 내 자의식이 관심받고 싶은 것일지도, 무언가를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어떤 점을 인정받고 싶은 걸까? 나의 똑똑함? 나는 이렇게 잘 산다? 그렇다기엔 그저 써야 해서 쓰는 글이 더 많다. 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아서, 쓰지 않으면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서,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게 어떤 무게나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사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다만 나는 나만 아는 사람이어서, 나의 연애, 나의 연인, 나의 사랑에 대한 글의 비중이 좀 높을 뿐. 그 글들에 내 진심이 담겨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