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주장 구분하기
'사실'과 '주장'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 적어도 그것을 따지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이 좋다. 자신이 '믿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과학이 좋았다. 나무는 타고 쇠는 왜 녹는지, 비는 왜 하늘에서 내리는지, 가지고 있던 머릿속의 많은 질문들을 물리와 화학이 해결해 주었다. 세상의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깨우쳐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과학 과목 중에서도 지구과학은 재미가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빛으로도 몇백 년을 가야 하는 아주 멀리 있는 곳에 있다는 다른 은하계, 지구의 가운데에 있다는 내핵과 외핵 등, 누구도 확인할 수 없고 완벽하게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시험까지 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진리다.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증명되어 있는 '진리'. 지구 위에서는 인류 전체가 동의할 수 있어야 하는 유일한 사실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과학이 좋다.
역사나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학계의 이론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증명할 수 없더라도, 객관적 사실에 무척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진실이 아니라 생각해서 외면했던 먼 우주와 지구내외의 생명체에 대한 많은 이론들, 땅 속에 묻혀있는 그림과 장신구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는 먼 인류의 역사 등을 알면 알 수록 나와 나의 사회, 사람들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의 나열만으로도 현재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은 애매한 이러한 부분에서 논란과 다툼이 발생한다. 인류의 발전, 종교의 발생에서 우리가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고문서, 전쟁의 흔적, 문명의 증거인 폐허가 된 건축물과 상징물들 까지다. 거기서부터 짜 맞추어진 '역사'라는 텍스트는 사실 백 퍼센트 진리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 조각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성경은 결국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각각 이 시대 적었고, 어디에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는 역사는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긴 하더라도 백퍼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옛날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직접 그 성경을 적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누가 적었든, 성경은 여전히 전 세계인의 베스트셀러이다.
명제마다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는 정교한 과정은 매우 귀찮다. 책을 읽을 때 그것이 구분되어 있는 책은 귀찮지만 그래서 재미있다. 사실이 무엇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책은 피곤하고 믿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알랭 드 보통이 있다. 그의 사유는 분명 의미 있고 재치 있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순 없기에 결국 그의 글과 책은 두리뭉실하고 억지스러움이 묻어난다.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에 대해서 집중하게 되면, 결국 내가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은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진화론을 지지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생태계를 가장 잘 설명하기 때문이지,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한순간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또한 진화론과 기독교가 한 개인 내에서 양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유전자들의 생존 법칙을 따라 생겨났다는 진화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 그 진화 자체가 하느님의 큰 뜻이라 믿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많은 사회적 갈등과 분란이 사실과 주장, 즉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지 못해 발생한다. 지역과 문화 발전에 따라 인류가 각자 믿어온 믿음이 종교로 발전했다는 그 역사적 흐름과 실제 교리들을 공부하다 보면 '내 말을 믿으라'는 독선적인 외침의 근거는 실상 해당 종교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많은 인간들을 움직이는 것은 지독한 감정 때문일 때가 많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