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 17년 7월

단편 소설

by 김소윤

"...... 파도는 있잖아, 끝이 나질 않는다."


나연이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호영이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이 지구가 이 우주가 돌고 있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겠지. 끌려간다 싶으면 다시 몰아쳐오고, 자글자글 부서진다 싶으면 그 위를 덮는 다음 파도가 있다. 부서지는 그리고 다시 몰려오는 파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 힘은 나연을 왠지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밤 열두 시가 다된 시각. 파도의 끝자락에 해변 가로등의 불빛이 겨우 닿았다. 하얀 포말이 쏟아지는 파도인지 그 너머의 어둠인지 온통 시선이 쏠려있는 나연을 흘끗 바라보고, 호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손이 까슬했다. 엉덩이의 반이 모래에 파묻어 있었다. 팬티 안까지 까슬함이 느껴졌다. 손의 모래를 탈탈 털어내고 휴대폰의 볼륨을 두어 칸 올렸다. 파도 소리에 묻혀있던 음악소리가 나연의 귀에 겨우 닿았다. 나연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준의 휴대폰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빛에 나른함이 묻어있었다. 둘의 귓가에는 파도소리가 맴돌았다. 잠자코 들고 있자니 파도에 섞인 음악 소리도 꽤 괜찮았다.


"좋네."


나연이 내뱉듯 말하고 다시 고개를 파도로 돌렸다. 호영은 남아있던 맥주를 쭉 들이켰다. 나연도 자신의 캔을 집어 흔들어보았다. 이미 식은 지 한참이 지난 맥주였다. 옆에 있던 소주를 맥주캔에 섞어 넣었다. 맹맹하던 맥주는 이제 쓴 맛이 났다.


사실 지금 옆에 있는 그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다행히 호영은 잘생겼고, 몸도 좋고, 음악 선곡도 맘에 들어. 또......


나연은 흐뭇하게 호영을 바라봤다. 취기가 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워 자신의 팔에 살짝 엎드려 기댔다. 호영이 옆으로 기울었다. 나연은 왠지 모르게 쪼그리고 앉아있는 자신을 호영이 귀엽게 여길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더 우스워 나연은 맥주캔에 남아있던 액체를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나연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호영과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의 나르시시즘이었다. 섹스를 하는 동안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취한 듯했다. 그녀의 기분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나 이렇게 잘해! 나 멋지지! 나 어때? 나연은 습관적인 신음소리를 내긴 했지만 이 행위가 얼른 끝나길 바랐다. 새벽녘에 그의 집을 빠져나오며 후회했다. 그녀의 기억에 원나잇의 첫 상대쯤 되었을까. 그는 허리 놀림은 화려했지만 상대방의 기분은 살피지 않는 나르시시즘 섹스였다. 나연은 그의 섹스를 그렇게 명명한 자신이 뿌듯할 정도로 적확한 표현이라 자신했다. 십여 년쯤 지켜보니 섹스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나르시스트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 자기 연민에 갇혀 사는 남자. 하긴, 갇혀 있다고 하기엔 너무 잘생기긴 했다.


나연은 호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높진 않지만 오뚝하게 자리를 잘 잡은 잘생긴 콧대를, 긴 속눈썹 아래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찬찬히 살폈다. 그래, 자알 생겼지. 호영은 나연의 시선을 느끼면서 짐짓 파도에 빠진 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십 년이나 지났으니, 나아지지 않았을까? 문득 나연의 눈길이 호영의 손에 가 닿았다. 나연은 예전부터 손이 예쁜 남자가 좋았다. 호영은 손가락이 길고 손이 예뻤다. 나연이 한번 더 맥주캔에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무게에 실망했다.


"...... 술 다 먹었어."

"...... 이제 일어날까?"

"응, 이제 들어가야지."

"...... 그래, 들어가야지."


모래가 발 끝을 붙잡았다. 나연이 살짝 비틀거렸다. 호영이 얼른 나연의 손을 잡아주었다. 엉덩이와 바지 곳곳에 묻은 모래를 대충 털어내고, 둘은 걷기 시작했다. 호영의 숙소는 해변과 가까웠다. 어쩐지 나연이 호영을 데려다주게 되었다. 나연의 집은 걸어가긴 조금 멀고 택시를 타기는 애매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호영이 자고 갈래, 농담처럼 내뱉었고, 나연은 미쳤냐며 호영의 어깨를 툭 쳤다.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나연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발끝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호영이 적당한 타이밍에 나연의 손을 잡았다. 나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영의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나연의 손은 호영의 손에 쏙 들어갔다.


해변 앞 번화가는 길지 않았고 금세 어두운 골목에 접어들었다. 호영은 정말 적당한 타이밍에 나연을 살짝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는 감탄할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호영은 잘생긴 얼굴만큼 키스도 잘했다. 살짝 두꺼운 두 입술이 부드럽게 나연의 입술에 부딪혀왔다. 나연이 긴장을 풀 정도의 시간이 살짝 지나고, 부드럽게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온통 부드러운 것들이라 나연은 그만 잡고 있던 가방을 놓칠 뻔했다. 나연의 허리를 호영이 감싸 안았고, 나연이 그의 팔 안에 안겼다.


"하아..."


나연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호영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나연의 입술이 떨어지자 호영의 입술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나연의 귀를, 목덜미를 따라 쇄골까지 내려왔다. 나연은 계속해서 신음을 내뱉었다. 나연의 팔을 힘없이, 꼭 붙들었다. 나연은 누구에게나 목덜미가 성감대였다. 다리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나연이 호영의 팔을 꼭 붙들며 어깨 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골목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연의 집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불안했다.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나연은 호영의 품 안에 폭 들어갔다. 호영은 나연의 머리를 잠자코 쓰다듬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등산복 입은 남녀가 지나가고,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연이 먼저 호영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걸을 때마다 그의 팔에 나연의 가슴이 스쳤다. 조금 걸으며 제정신이 돌아오자 나연은 고민을 시작했다. 호영과 자고 싶다. 나연은 이미 발끝까지 달아올랐다. 하지만 또한 여기까지가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십 년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호영의 SNS가 떠올랐다. 섹스도 마찬가지일 거야. 섹스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돼. 그는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나연은 자신 있는 호영의 뒷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빠른 발걸음에 질질 끌려가듯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호영의 숙소 앞, 사람들이 절대 다니지 않을 골목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키스를 시작했다. 나연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호영의 입술이 부딪혀오자 정신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호영은 더 솔직하고 당돌하게 나연을 원한다고 말했다. 서로의 입술이 입술을 탐하고, 혀가 엉켰다. 호영의 손이 부드럽게 나연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하..."


나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연이 몸을 살짝 옆으로 빼자, 호영이 다시 목덜미에 혀를 굴렸다. 나연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섹스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직 그녀는 결정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등을, 허리를 만졌다. 민감한 배는 건드리지 않고 엉덩이로 내려갔다. 나연은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두 엉덩이를 감쌌다. 나연은 발꿈치를 들어 두 팔로 호영의 목에 매달려 안겼다. 눈이 풀렸고, 혼자 서있을 수 없었다. 호영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치마 사이를 부드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얇은 롱치마와 면으로 된 레깅스를 입었다. 얇은 천들 위로 그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아..."


나연이 호영을 밀어냈다.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붉어진 귀가 어둠에 가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돼."


나연이 샐쭉하게 호영을 올려다봤고 호영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영이 나연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나연은 피하지 않고 호영을 빤히 올려다봤다. 까만 눈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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