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 17년 12월

단편 소설

by 김소윤

나연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하루 종일 이 침대에 눕기만을 기다렸다는 걸, 막상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의욕 없는 손가락이 오전 7시 알람을 켰다. 지금 12시, 바로 잠들면 7시간 잘 수 있구나. 내일 오전 미팅이 9시에 시작하니까 절대 늦으면 안 된다. 베개를 정돈하고 머리를 데고 누웠다. 다시 휴대폰을 집어 6시 55분에 하나 더 맞추어 놓고, 7시 5분 알람도 켜 놓았다. 아아, 질끈. 눈 감기가 싫었다. 시각 정보를 차단할수록 더 머리를 꽉 채우는 생각들을 지우려 유튜브를 켰다. 가끔 즐겨보던 눈에 익은 영상들의 목록이 주르륵 펼쳐졌다.


앳돼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잘생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영상을 클릭했다. 대학생 남자 후배가 한 여자 선배를 좋아해서 모임마다 따라다니며 챙겨주고 있었다. 여자는 그 남자 마음을 모르는 듯했고 남자 후배는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자상하게 여자를 챙겼다. 6분 내외의 짧은 영상이었다. 미처 끝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나연은 다음 영상을 클릭했다. 광고가 나오는 걸 깜박했네. 흐름이 잠시 끊겼다. 다음 영상에선 여자의 마음이 나왔다. 사실 그녀도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 여자가 무언가 행동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영상이 끝났다. 나연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보다 열 살은 더 어릴 것 같은 배우들의 설레는 표정을 따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 번째 영상을 틀었다. 광고를 스킵하려다 공유의 얼굴이 클러즈업 됐다. 어머, 등산복을 입어도 잘생기다니. 나연은 손가락을 멈추고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세 번째 영상이 시작되었다. 당장이라도 '너 좋아해!'라고 소리 지를 것만 같던 여자는 어물쩡 말을 돌리며 남자와 또 선을 그었다. 나연은 왠지 참지 못하고 애매한 제목들이 하나씩 달린 영상들을 주르륵 살펴보다가,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연애의 시작은, 요즘은 썸이라고 하지. 그것 참 달콤하다. 하지만 실은 그다음 단계가 더 어려운걸. 사귀기 시작한다. 약속 같은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연락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 여유롭던 주말이 복잡해진다. 잘 잤어? 잘 자. 주말에 만나자고 미리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이번 주말엔 좀 쉬고 싶은데. 가만, 저 쪽은 내가 보고 싶지 않나? 크리스마스 때는 어느 정도의 선물을 사야 하는가. 여사친이 많은 남자라는 걸, 혹은 술 약속이 많은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 매일매일 정성 들여 안부를 전하던 카톡이 야근 때면 뜸해지거나 술자리에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내 불안을 숨겨야 하는 걸까. 연애에서 정말 어려운 건 이런 건데, 수많은 영상들 중에 그런 걸 가르쳐주는, 아니 같은 고민을 하는 영상들은 왜 찾아보기 힘든 걸까.


나연이 자세를 돌려 자기 키 반 만한 곰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그를 떠올렸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그와 헤어졌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작년부터 만난 남자들 모두 한 달을 채 못 채우고 헤어졌다. 작년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올 겨울에 한번. 사귀기로 한지 한 달 만에, 그렇게 각각 세 명에게 차였다. 나는 이제 긴 연애는 못하는 걸까. 뭐가 문제였을까. 바쁜 그에게 왜 연락 안 하냐고 한 소리 한 게 그렇게 잘못한 거였을까. 우리의 연락은, 만남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했던 걸까. 그런 것들을, 보통 연인들은 어떻게 정하지?


스무 살 때 했던 4년이라는 긴 연애를 기억했다. 둘 다 뜨겁게 끌렸던 첫사랑.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동아리 선배로 만났던 그에게 끌렸다 싶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귀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서로의 수업 시간표를 외우다시피 했고, 동아리 방에 가면 그가 기타를 치며 그녀를 기다렸고, 시험 기간엔 같이 공부를 했다. 사람들은 으레 나연의 행방을 그에게 물어봤고, 나연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군대 있을 때 확실히 그래서 더 힘들었지. 빈자리가 너무 컸으니까. 나연은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와 헤어졌지만, 2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어느새 복학생인 그를 자연스레 다시 만나고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던 그녀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하자 거의 일주일의 반을 같이 살기 시작했다. 이사를 한다거나 어딘가 쇼핑을 간다거나, 남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되었다. 아니, 도와주지 않으면 화를 내도 될 만한 사이였다.


어느새 부턴가 타인에게 부탁을 한다는 게 어려워졌다. 그 무게를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게 단지 마음일 뿐일지라도.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세상이 복잡해진 걸까.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까.


나연은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잠자기는 글렀다. 미팅 준비는 다 했나? 본사한테 컨펌받아야 되는 거 하나 있는데, 메일이 왔으려나. 나연이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소리 내며 움직이는 유튜브를 서둘러 종료시켰다. 메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미국 놈들. 나연은 잠시 망설이다 페이스북을 열었다. 검색창을 열자 그의 이름이 제일 위에 떴다. 요즘 하루에 한 번은 들어가는 것 같다. 미친. 속으로 욕을 하면서 나연은 그와 아직 페친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그의 담벼락은 다 업무 얘기였다. 나연과 헤어져서 힘들다는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연은 괜스레 댓글 창을 하나하나 열어서 살폈다. 그는 밝아 보였다. 나는 여기서 뭘 찾는 걸까.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우리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나연 씨, 저 너무 힘들어요."


나연이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다 쏟아붓는데,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 말 한마디에 나연은 그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의 까만 눈동자의 안쪽 그 깊은 속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음영마저 삼켜버린 까만 눈동자. 무언가 구멍이 뻥 뚫려버린 듯한 그 눈동자를 나연은 한참 바라봤다. 그 눈동자가 떠오르자 나연은 살짝 몸서리를 쳤다. 지친 눈동자. 나연의 사랑에 지친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고 있는 남자였다. 세상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남자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 따위 없었던 사람이었다.


아니다, 사랑하는 것은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연은 억지로 그를 이해하려 했지만 실은 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연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고, 자신이 그것에 비해 부족함을 느낄 때 절망했다. 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사랑하는 인격체 둘이 만나 이루어내는 변화와 성장은 다른 어떤 식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유의미한 것이다. 타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온전히 겹쳐지는 경이로움을 동경했다. 문학책에 나오는 사랑의 의미를 나연은 맘껏 이해하고 있었다. 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연은 그저 슬펐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를 끌어안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연의 입에서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를 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미소가 잘 감추어지지 않았다. 숙인 그의 고개 밑으로도 그의 미소가 번졌다.


"저,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나 나연 씨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가 나연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조그맣고 따뜻했다. 나연은 온 마음이 따뜻함으로 충만해지는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한 따뜻함이 온몸을 채우고 나연의 입가에까지 흘러넘쳤다. 나연은 한쪽 손을 마저 내밀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꿈은 너무도 생생했다. 생생해서 그런가, 잠에서 깨고 눈을 뜨기도 전에 그게 꿈이란 걸 알았다. 고통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방 안의 어둠이 뿌옇게 걷히고 있었다. 반짝반짝하던 따뜻함이 눅눅하고 진득하게 녹아내리면서 가슴 곳곳으로 뜨겁고 파고들었다. 꿈속에서의 환희는 그대로 날카로운 아픔으로 변했다.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알람을 맞춰놓았던 시간보다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꿈을 꾼다면 다시는 잠들고 싶지 않다. 나연은 천천히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가슴속이 시큰했다. 저 깊은 곳에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뜨거운 물을 틀고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플 때는 천천히 숨을 쉬어야 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헤어지자는 통보를 들은 이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코트가 어울리는지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다. 지금 옷이 문제겠는가. 집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훅 머릿속을 식혀주었다. 억지로 오늘 일과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잘 되었다. 오전부터 미팅이 있고 오후에도 일이 많다. 그를 생각할 시간 따위 없다.


항상 길을 건너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양쪽을 살폈다. 2차선 도로였으니 그리 좁은 골목은 아니었다. 문득 나연은 세상이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느꼈다. 항상 차가 양쪽에서 시간차를 두고 달려와 길을 건너기 힘든 곳이었는데. 길가에 차가 한 대도 없었고, 반대쪽은 주차된 차마저 한대 보이지 않았다. 나연은 뭔가 모를 두려움을 살짝 느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흔하게 들리던 새소리도,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좁은 골목이 아주 넓고 새하얀 공간으로 느껴졌다. 공간이 그저 차가운 공기로만 가득 차 너울거리는 느낌이었다.


길을 반쯤 건넜을까, 정막에서 오는 두려움에 나연이 차가 오는지 보려고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발가벗은 상체가 그녀를 껴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들은 딱 한번 잠자리를 가졌다. 그녀가 그의 위에 올라타 먼저 옷을 벗어던졌고, 그의 옷을 벗겨내었다. 따뜻한 그의 상체를 같이 벌거벗은 그녀가 꼭 껴안았다. 그의 짧고 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모텔 프런트에서 시간이 다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서도 그는 그녀의 위에서 격렬하게 움직였다. 침대에 거꾸로 누워있던 그녀가 자꾸 침대 밖으로 미끄러져 밀려났다. 그들은 두 손을 잡고 꺄르륵 웃었다. 그녀가 그의 위에서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고, 그가 눈을 감았다.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을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연이 길 가운데서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왜 그 순간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고 아침 햇빛이 눈 앞에서 부서져 내렸다. 온갖 이미지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드디어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제발, 내버려둬라. 그녀가 길을 다 건너자마자 거짓말처럼 양쪽에서 차들이 몰려왔다.


출근한 나연이 책상 위에 핸드백과 노트북을 내려놓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선배 하나가 커피를 마시자며 불러냈다. 그녀의 짧은 연애가 막 끝난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알려주지 않아도 나연은 사랑에 빠졌을 때와 그게 끝났을 때 티가 아주 많이 났다. 온 지구가 알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주말에 잠은 좀 잤어?"

"네, 뭐."

"괜찮을 거야. 알잖아, 또 좋은 사람 나타날 거야."

"...... 이제 사랑 안 할 거예요. 너무 지쳐요."


선배가 하하, 하고 웃었다. 나연이 눈썹을 세워 그를 뾰족하게 바라보았다.


"왜요, 거짓말 같아요?"

"아니, 정말 사랑 안 하는 사람은 그런 말도 안 하거든."


나연이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나연은 생각했다. 너무 지친다.


매거진의 이전글아픈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