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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자유부인들은 집으로 돌아가세요-<빙점>

괴도 박둥둥의 월급루팡 도서리뷰

by 박둥둥


일본의 주택가에서는 저녁 6시쯤 되면 착한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방송이 나온다.

이 얘길 왜 하냐면 우연히 스레드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에 대한 감상으로 기독교의 용서를 표현한 작품이라 감명 깊었다고 쓴 걸 읽었기 때문이다. 작가도 그렇고 이 책에 대한 대부분의 해설도 그렇게 설명하니 이 분도 그렇게 써 놓으신 것이리라.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작품에서 기독교적 요소는 그저 포장지일 뿐이다.

<빙점>이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감동적이라서'가 아니라 '끝내주게 재밌어서'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안다.

비록 작가는 진심으로 기독교를 작품에 녹여내려 한 것 같지만, <빙점>이 실제 독자에게 어필하는 포인트는 부정한 아내에게 살인범의 딸을 기르게 하는 음흉한 남편과 이에 맞서 요코를 구박하는 악녀 나쓰에 에 눈같이 순수한 요코가 만드는 긴장관계, 더불어 근친상간을 연상케 하는 도오루의 비뚤어진 애정이 만드는 치정극장이다.


사실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은 <자유부인>이 그랬듯이 일본만이 아니라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다른 나라들에서도 발견된 현상이다. 즉, 전쟁 때 집을 비웠던 남자들이 돌아왔으니 그동안 나가서 일을 했거나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자유연애를 한 부인들에게 정신 차리고 집에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는 것이다.


<자유부인>의 마지막 문장이 '그리운 집으로'인 것처럼 <빙점> 역시도 아버지의 명으로 선봐서 결혼한 나쓰에라는 여성이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느낀 연애감정에 대해 호된 철퇴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 <빙점>은 영리하게도 나쓰에의 '얼룩'을 더 돋보이게 할 순백의 존재 요코를 등장시킨다. 부당한 학대도 참아 넘기고 우등생인 데다 불타 오르는 미모를 가진 요코라는 캐릭터는 결점이 없다는 점에서 심히 무미건조한 캐릭터이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로 인해 나쓰에는 악녀로 진화하며 역으로 캐릭터의 생명력을 얻는다. 이 둘의 대결이 <빙점>을 끌고 가는 에너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빙점>의 진짜 주인공은 요코가 아니라 나쓰에라 볼 수 있다.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명으로 연상의 답답한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여 바로 아이 둘을 낳고 사모님으로 사는 무료한 삶에 처음으로 연애감정이 들게 한 젊은 미남의사에게 잠시 한눈을 판 것으로 지나치게 엄청난 벌을 받은 그녀의 분노가 <빙점>의 요코를 비롯한 다른 캐릭터는 물론이고 전체 풀롯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본격 기독교 메시지가 심화되는 <속 빙점>은 오히려 심심하다. 요코가 메인 주인공이 되면서 나쓰에는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쳐도 답이 없는 여자로 뒷방 늙은이 처리되고 이를 보완해야 하는 새로운 빌런인 다쓰야는 딱히 동기도 성격도 이해가 안 되는 미친놈으로만 그려지기 때문이다.

정말 작가의 의도대로 회개와 감동이 작품의 메시지였다면 <속 빙점>이 훨씬 재밌어야 하는데 실제론 요코가 결국 누구랑 결혼하나 이왕 본 거 궁금해서 끝까지 본다는 관성에 이끌려 책장을 넘길 뿐이다.


그렇기에 <빙점>은 작가나 뒤에 붙은 해설을 역으로 뒤집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코의 편에 선 서술자를 의심하고 회개의 의미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요코와 게이조, 도오루, 기타하라, 다쓰코 등등과 더불어 서술자까지도 나쓰에를 비난할 때, 성경의 장면처럼 나쓰에의 편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이놈들아! 하고 나쓰에의 편으로 <빙점>을 읽어본다면, 이 작품은 끝내 용서받지도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탕녀 나쓰에의 이야기로 새롭게 다시 읽힐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착한 아이, 혹은 나쁜 여자, 자유부인의 이야기가 <빙점>에는 숨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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