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로움과 진부함의 자장과 실패- 김려령의 <트렁크>

괴도 박둥둥의 월급루팡 도서리뷰

by 박둥둥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넷플릭스의 드라마 <트렁크 > 때문이었다.

아직 드라마를 다 보진 못했는데 책을 읽어본 감상으로는 기본적인 설정과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만 소설에서 가져왔고 드라마는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에게 결혼은 제도인가 순리인가?

계약결혼물은 이 지점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조건과 외모와 연령 등이 비슷해 보이는 두 남녀가 실은 계약결혼을 맺은 가짜부부라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계약결혼물은 대부분의 이야기가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탄생함으로써 가짜결혼이었던 계약결혼이 그 어떤 부부보다 진실한 진짜 결혼이 된다는 결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계약결혼물이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드문 것도 이에 기인한다. 처음엔 결혼제도의 허위성을 기만하고 비판하는 듯하다가 종래엔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결혼의 본질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결혼관으로 회귀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계약 결혼물은 섹스를 배제한다. 마지막엔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이 결혼을 완성한다는 결말을 보여줘야 하기에 둘의 계약결혼에 섹스가 포함되는 순간 ‘순수한 사랑’은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려령의 <트렁크>는 이 부분들을 비틀고자 한 시도로 읽힌다. <트렁크>에서 계약결혼은 철저하게 비즈니스적 관계로 거대자본을 가진 결혼정보회사가 두 사람을 중개하여 계약결혼을 관리한다. 종래의 계약결혼물처럼 두 사람만의 비밀계약이라면 ‘사랑’을 발견한 순간 자연스럽게 '거래'는 녹아 사라지지만, <트렁크>의 계약부부 사이엔 회사가 중개되어 있기에 상품인 아내 혹은 남편과의 진짜 사랑을 통해 결혼으로 가는 길은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막혀 있다.


또한 <트렁크>의 계약결혼에는 섹스가 포함되어 있다. <트렁크>의 계약결혼은 결혼을 구매한 측이 권력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재현하도록 상대에게 주문하는 입장이기에 계약아내나 남편은 그 요구를 사실상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 어떤 서비스도 설정도 섹스도 기본은 서비스업의 모토인 <We never say No>의 명령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 비틀기가 오히려 참신하기보다는 식상함을 더하는 이유는 이쯤 되면 멀쩡한 대졸여자가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위험하고 더럽고 앞날보장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게 읽으면 읽을수록 잘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사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계약사항이 등장할수록 도대체 주인공 노인지는 왜 굳이 이런 식으로 몸을 파는가?라는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화류계로 가는 게 더 안전하고 수입도 높다고 작중에서도 노인지가 자기 입으로 언급하기에 더더욱 시장논리와 맞지 않는 이 설정구멍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물론 노인지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트라우마가 있었다든지 하는 소설적 장치도 있고, 이들의 계약결혼이 단순히 성을 파는 성접대 서비스가 아니라 이상적인 결혼을 파는 직업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그럼 이런 직원을 구하기 힘드니 (고객에 대한 비밀유지 조항도 있다) 노인지는 더 회사에 당당해야 할 것 같은데 작중 노인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객이 컴플레인하면 금방 인사고과가 나빠지는 파리목숨 비정규직의 설움이 주가 된다.


그럼 계약결혼물의 궁극적 목적인 현재의 결혼제도에 대한 신선한 문제제기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딱히 뭐가 없다. 뭐가 이상적인 결혼인지 혹은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이라는 건지 소설은 딱히 말이 없고, 그저 결혼이란 해도 거지 같고 안 하면 더 거지 같은 것이라 사람들이 한 번쯤 자기 입맛에 맞는 결혼을 해보고자 이런 서비스에 가입한다는 애매한 설명뿐이다.


결혼, 매춘, 그리고 시장논리가 사랑이라는 감정과 어떻게 서로 긴밀한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고민의 필요.

이 작품에 대해 한줄평을 한다면 이 정도일까.


지금은 그저 이 말만을 하고 싶다.


“노인지 씨 제발 그딴 회사 때려치우고 딴일 찾으세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을 담은 겨울의 이야기- 조해진, <겨울을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