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가장 좁고 가장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을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이제 다른 한 사람은 없고
긴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한 사람만 남았다
살구나무는 잘 있지요
안 들리는 안부는 으문문과 평서문 사이에 있고
살구꽃말은 수줍음 또는 의혹
(중략)
수줍음과 의혹으로 가득 찬 페이지는 무겁다
때로 어떤 예감은 법칙보다 서늘하고
저 새는 왜 오래된 이야기를 물고 왔을까
후드득 살구 한 알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먼 속삭임들, 닿을 텐데 닿을 것만 같은데
- 이은규(1978년 ~ )는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으로 등단하여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