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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시 읽기

by 박둥둥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고정희(1948-1991)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애서 태어났다.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 그 이후' 등이 추천되면서 등단하였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역사의식과 여성 해방 의식을 탐구한 시를 썼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이 시대의 아벨"(1983),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등이 있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뱀사골에서 등산을 하던 중 실족사했다. 향년 4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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