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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상 Irondenker Jun 03. 2024

달력

송구영신을 위한 자못 진지한 잰말놀이

찢긴 달력을 보고 있자 연말이 다가옴이 느껴진다. 영겁 아닌 시간을 보내도 길게 느껴지더니 이제 찍힌 날짜조차 앞으로 거진 육일은 족히 남았을까. 감사의 날은 간사한 나로 바뀌고 충만함은 교만함으로 되받는 과정이 아닌가. 즐비한 신년의 계획이 있다만 공란과 누락이 꽉 차 당락의 판단이 의미 없다. 황옥같이 여기라던 시간은 싱그러운 것을 받게 되면 또 몽돌같이 여기겠지. 조석처럼 밀려왔다 쓸려나가겠지. 남은 나의 생각들은 또다시 미결수, 판단도 안 나고 이미 벌써 몰아든 채 결심(結審)을 했나. 쉼 없는 피력이 눈 뜬 채 부질없고, 빛이 나던 이들이 지리멸렬이 돼가고. 목이 메어갖고 잃을까 움츠리던 것도 혹시 해갈까 눈치만 보던 것도, 이것저것도 걱정도 정도 정도에 가히 갑절 씩 노닐던 것도 이리 헛돌 줄 알았으면 괜히 염려치나 말 걸. 머릿속을 맴돌던 각종 허깨비와 돌겠는 것들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냈다면 이리도 망설였을까. 미신인 걸 알았다면, 미쳐 죽지 못해 했던 일들이 날 죽이지 못한단 걸 알았다면, 앓아눕더라도 날갯죽지 한 번 펴본다라고 말했다면 직전의 나날도 주욱 이어 못질할 수 있을까. 남은 달력도 이제 찢고 모두 보내자. 낱장 낱장의 이실직고는 그만해보자. 새로운 모음종이만큼은 싱그러움 태우고 황혼이 되면, 대충 덧없다고 둘러대는 말속에 충만을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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