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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 아빠 Jan 27. 2024

‘지옥’에서 살아남은 한 생명, 새로운 삶을 기다린다

무더기 사체 쏟아졌던 천안 ‘에니멀호더’ 사건, 그 이후

우리 집에 한 달째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츄리 Ⓒ luke wycliff

2023년의 마지막 날, '츄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다. 처음엔 길어야 일주일 정도 머무르다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한 달 가까이 손님으로 머무는 중이다. 


처음 왔을 때 만해도 츄리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고,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특히 고양이가 잘 걸리는 구내염 때문에 연신 침을 흘리고 입에서는 악취가 났다. 장기능도 좋지 않아 먹을 것을 주면 설사하기 일쑤였다. 또 여느 집고양이처럼 화장실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듯 사방에 모래를 뿌려 놓았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가 커서인지 종종 이상행동도 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았다. 처음 온 날, 아내는 츄리를 목욕시켰는데 아주 얌전히 목욕을 하더란다. ‘쓰담쓰담’ 해줘도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내는 구내염 약 먹이는 한편, 설사를 잡으려고 약을 먹이다 설사가 잡히지 않자 사료를 바꾸는 등 츄리를 돌보는 데 힘썼다. 화장실 치우는 일은 내 몫이 됐고. 


20여 일이 지난 지금 츄리는 영역에 적응했는지 혼자 있을 때면 캠핑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한 번은 혼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츄리는 기겁을 하고 다시금 자기가 머무는 방으로 줄행랑 쳤다. 그래도 처음 왔을 때처럼 우리 부부의 손길은 거부하지 않는다. 


츄리가 날로 건강과 안정감을 되찾아 가니 다행스럽다. 츄리의 과거를 생각하면 대견하기까지 하다. 


봉명동 ‘애니멀호더’ 사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츄리 


지난해 11월 천안시 봉명동에 있는 60대 독거노인 집에서 고양이 사체 500여 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일이 있었다. 그때 지역 동물보호활동가들이 그야말로 총출동해 고양이 사체와 배설물 등을 치웠다. 


당시 일은 감당할 능력 이상의 동물 개체수를 들이는, 전형적인 ‘애니멀 호더’ 사건이었고 다수의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룬 기사를 쏟아냈었다. 


활동가들은 사체와 배설물 등을 치우면서 살아남은 고양이들을 구조했다. 그때 28마리가 구조됐는데, 안타깝게도 한 마리는 폐사했다. 


그리고 상태가 심각한 한 마리는 활동가가 데려갔고 다섯 마리는 서울 소재 동물보호단체에 입양 보냈다. 이렇게 해서 21마리가 남았고, 활동가들은 이후 계속 고양이들에게 새 삶을 찾아주고자 했다. 현재 대부분은 사설쉼터로 보냈고, 몇몇은 가정으로 입양갔다. 


그중 마지막 남은 고양이가 바로 츄리다. 다시 한 번 적지만 츄리를 보면 볼수록 대견하다. 그 생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용케'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부부는 쿠키·애옹이·봉순이 이렇게 세 녀석과 함께 지낸다. 고양이 셋과 지내다 보니 화장실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츄리 화장실만큼은 아침·저녁으로 치워준다. 또 츄리가 잘 지낼 수 있도록 수시로 방청소도 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몇 년의 시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배설물과 사체로 가득했던 곳에서 살았던 만큼 지금 있는 동안만이라도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다. 


그 마음을 알았을까? 하루는 이 녀석 화장실을 치워주는데, 쪼르르 오더니 스킨십을 해줬다. 고양이 집사들이 흔히 하는 말로 집사로 '간택' 받은 것이다. 


독거노인 집에서 고양이 사체가 수백여구 쏟아져 나왔다거나, 수상한 차림의 괴한이 길고양이를 학대했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면 언론에선 기다렸다는 듯 온갖 기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언론의 관심은 딱 그때뿐이다. 

천안 봉명동에서 벌어진 ‘에니멀 호더’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그토록 끔찍한 환경에서 수십 마리 고양이가 살아남았고 활동가들이 고양이들에게 새 삶을 찾아줬다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생명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는 소식은 경이롭지 않은가? 


요샌 츄리를 보면 늘상 아내에게 묻는다. 츄리 언제 가냐고. 그때마다 아내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하지만 우리 가정 여건상 츄리와 이별해야 하는 시간은 곧 닥쳐올 것 같다. 


츄리가 가는 날을 묻는 이유는, 헤어지게 되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미리 날짜를 알아두고 헤어질 준비를 하려 해서다. 츄리가 떠나면 한동안은 마음이 허전할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츄리가 마땅한 입양처를 찾지 못해 고민이다. 츄리에게 관심 있는 이가 나타나줬으면 좋겠다. 츄리를 다시는 끔찍한 곳으로 되돌려 보낼 수는 없다. 관심 있는 분들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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