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특별전. 용인 호암미술관

by 아이언파파

일요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내와 아이는 이미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나는 뒤늦게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오늘은 어디 갈까?"

전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관람을 하던 중, 내 나름 의미심장하게 "우리 내년 봄에 이탈리아 로마에 가볼까?" 얘기를 꺼냈지만 아이는 듣자마자 "아니, 그건 좀 그런데....." 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탓에 내 기분이 상했던 일이 있었다. 요즘 아이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아빠가 하자고 하는 것에는 반사적으로 거부 반응과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1차로는 아이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나의 탓이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거절을 당하면 이유와 원인을 따져 묻기 이전에 나의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원래 지난번 가려고 했던 용인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전시회, 그게 다음 주까지거든. 우리 다음 주말에는 대구 가잖아. 그래서 오늘 가면 어떨까 생각했지."

아이는 무조건 반사와 같은 대답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다.

"아니, 그건 좀...... 그냥 동네에서 놀고 싶은데?"

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아빠는 그것도 좋다."

내 감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아내가 나섰다.

"우리 그 전시회는 지난번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일 생겨서 못 갔던 거잖아. 원래 가기로 했던 거니 오늘 가보자."

아내가 가자고 하니 아이도 순순히 따라나선다. 나에게 큰 숙제가 생겼군.

다행히 차가 많이 막히진 않았다. 반포 IC와 양재 IC 등 경부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도로 상황이 원활하여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하였다.

용인 호암미술관은 처음이다. 미술관 건물 모양은 60,70년 대 분위기이지만 건물 내부는 고급스럽고 주변 조각과 정원 조경이 기품 있게 조성되어 있어 입구에서부터 들어가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 주차장에서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기분 좋은 곳이었다. 쓰레기통의 디자인과 재활용품, 일반 쓰레기를 구분하는 색상, 화장실 표시 픽토그램, 외부 조각상 안내 표지판까지 관람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작은 부분까지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관리하는 오래된 숙소나 식당처럼 아늑하면서도 단정함이 느껴진다.

관람은 1층부터 시작이다. 겸재 정선이 자주 방문하고 그림으로 남겼던 금강산 작품들과 함께 출발한다. 어릴 적 교과서와 잡지, TV 등에서 자주 봤던 금강전도를 비롯한 그림들이 이어지고, 특히 작년과 올해 집중적으로 읽었던 유홍준 작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봤던 내용들이 다시 생각나는 작품들이 많아 더욱 반가웠다.

한강과 서울 일대를 그린 작품들은 더욱 재미있었다. 정선이 태어나고 자랐던 인왕산, 수성동, 필운동 계곡 등 서촌 일대 그림 그리고 현재의 강서구청장과 같은 양천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남겼던 많은 한강 풍경들이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한양의 양반들과 영감들이 나들이를 하는 그림에는 꼭 시동이 함께 그려져 있다. 시동의 표정과 행동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시각디자인학을 전공한 아내는 그림 특성상 수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일필휘지처럼 한 번의 붓 터치로 단번에 그리는 동양의 산수화임에도 기둥과 지붕, 계곡과 낙수의 물보라, 서로 다른 종류의 나뭇잎들을 표현한 방법 매우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신기한 듯 감상하였다. 아내와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전시를 즐겼다.


아이에게는 동작진과, 서빙고 유역,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 북악산의 원래 이름인 백악산 등을 그린 작품들을 보며 유치원 친구네 집이 있는 곳, 아빠 엄마와 함께 나들이 갔던 곳이라고 상기시켰던 덕분에 아이도 재미있다 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서빙고 얘기를 하며 '빙고'는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하는데 왜 하필 우리 집 근처 한강에 서빙고, 동빙고가 있었던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생김새 때문에 물길의 곡선 안쪽(용산, 압구정 등)은 퇴적되고, 물길의 곡선 바깥쪽(광나루, 반포 등)은 침식된다. 덕분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한강물이 얼었을 때 얼음을 만들고 운반하기 용이한 곳이었다. 용산 지역 한강은 한양 궁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한강 지역 중 하나였던 데다 얼음 캐기도 좋은 곳이었으니 얼음 창고를 두기 좋은 곳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현재도 기상예보에서 '한강물이 얼었다.'는 기사가 나올 때 한강물의 어는 것을 측정하는 기준 위치가 한강대교 근처에 있다.

2층 전시실에는 화조영모도-꽃, 새, 동물, 곤충 등을 그린 그림도 있고 그 외 다양한 화풍과 화법으로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2층 전시도 즐거웠고,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들과 정선의 작품은 아니지만 감상에 도움 될만한 금강산 전도, 한양도성도 등도 볼 수 있었다.


전시를 마치고 출구로 나오니 창밖으로 또 하나의 작품이 펼쳐졌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호수, 정원의 풍경과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내와 나는 기분이 좋아 잠시 동안 유리창 앞 벤치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벤치에 몸을 비비며 누워 뒤척였다.

미술관 건물을 나와 정원을 거닐며 산책하였다.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조각상, 수련이 가득한 연못에서 정답게 먹이를 찾아 헤매는 오리 가족, 물소리가 들리는 호암정의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주차장 입구 방향으로 되돌아 걸어 나오면 호숫가에 거대한 거미 상을 볼 수 있다. 2021년 설치 당시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망(Maman)이다. 프랑스계 미국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 2010)의 대표작이다.

마망은 프랑스어로 ‘엄마’를 뜻한다. 말 그대로 모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생전 “알을 품은 암컷 거미를 통해 나의 어머니가 지닌 모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9m 높이, 10m가량 지름의 대형 거미 조각은 8개의 긴 다리를 갖고 있다. 자기 배에 품은 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인한 모성을 보이는 거미를 형상화하면서도 가늘고 약한 다리를 통해 상처받기 쉬운 여성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

아이는 작품의 의미와 맥락은 모르지만 신기한 듯 담장 너머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바라본다. 수변 공원이가 추락 위험 때문인지 출입은 통제되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큰 조각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즐거웠던 호암미술관 나들이. 집으로 돌아와 동네 팥빙수 집인 동빙고에 갔다. 오늘 한강 '빙고' 얘기를 했더니 동빙고를 떠올렸다는 아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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