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도 나가길 잘했다

잠실보조경기장을 떠나보내는 내 나름의 이별 방법

by 아이언파파

태풍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비바람이 있는 새벽이었다. 평소처럼 4시 30분쯤 일어났는데, 나갈까 말까 고민되었다. 그냥 집 안에서 사이클이나 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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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자전거는 마음만 먹으면 저녁에도 탈 수 있다. 내가 마음 편안히 달릴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새벽뿐이니, 지금 나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결국 나갔다. 잠실보조경기장, 잠보로 향했다. 다행히 막상 나와보니 비바람이 생각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달릴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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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보에 도착해 주차장 실내 간이 트랙에서 몸을 풀고 있으니, 몇몇 나처럼 이상한(?) 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다행이다. 이 날씨에 밖에서 뛰겠다는 미친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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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묘한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느껴지는 달리기였다. 대회나 기록에 대한 도전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기어코 새벽에 달리기를 마쳐야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러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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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달리기를 마치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 축구장 잔디를 밟으며 쿨다운을 했다. 비 내릴 때 잔디를 밟으며 가볍게 뛰면 예전부터 기분이 정말 좋았다. 최근 보조경기장에서 싸이 콘서트와 워터밤 공연 등이 있어 플라스틱이나 금속 파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위험하지는 않았다. 여름날 잠보에서 달리기를 할 때면 항상 이렇게 잔디에서 마무리 운동을 하고는 했다. 다른 경기장과 다르게 천연잔디이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이제 잠보에서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기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종합운동장 리모델링 계획에 의해 8월 15일부터 오랜 기간 잠보를 포함한 종합운동장 일대가 폐쇄된다. 그동안 잠보에서 뛰었던 기억들을 곱씹으며 남은 기간 하루하루 소중히 잠보를 달린다. 잠보를 떠나보내는 내 나름의 이별 방법 같은 것이다. 역시, 비가 내리지만 오늘 나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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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차를 몰고 잠보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라디오에서 굿모닝팝스가 나왔다. 중학생 시절 오성식 아저씨 진행 때부터 들어왔던 나의 애청 프로그램이다. 때마침 중간 선곡으로 Backstreet Boys의 <As long as you love me>가 나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노래이다. 한국 아이돌도 아닌 백스트리트보이즈, 웨스트라이프, 보이존 등등 미국 영국 아이돌 노래를 좋아하는 남학생이라니. 백스트리트보이즈 1집 노래들에 홀딱 반했던 나는 2집이 나올 당시 교문 앞 레코드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춰 10분의 짧은 쉬는 시간 동안 학교를 뛰쳐나가 CD를 구입하기도 했다. <As long as you love me>는 1집에 수록된 곡이었다. 고등학교 때 노래방에 가면 다른 노래를 실컷 부르다가도 꼭 이 노래를 한 번은 부르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날마다 흥얼거리고 가사를 통째로 외워 영어로도 연애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시절 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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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여름 새벽.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즐겁게 잠보에서 달리고, 내가 좋아하는 굿모닝팝스에서 <As long as you love me>라니. 역시, 비가 내리지만 오늘 나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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