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가난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로소 Mar 25. 2021

0. 가난감

prologue

  내 이야기는 7살 겨울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달력 앞에 서있었다. 그 달력의 한 날을 짚으며 곧 학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이야기의 시작은 정확히 그날이다. 설렘에 부풀어 그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 말이다.


  분명히 그 전의 기억도 있다. 새로 다니게 되었던 어린이집, 원장 딸과 아이들의 텃세. 낯선 친척 형제들과의 어색한 만남, 골목 안쪽 이웃집 남자아이와 매일같이 놀던 기억. 그 집 시멘트 담장에 꽂혀있던 깨진 맥주병 조각들.


  물론 더 전의 기억도 있다. 외할머니댁으로 가기 전, 의정부에 있는 고즈넉한 주택에서의 기억 말이다. 그 집 마당에는 닭과, 사람만 보면 짖는 커다란 개가 있었고 꽤 너른 밭도 있었다. 나는 그 집, 그러니까 우리 집 개가 짖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 늘 벌벌 떨어야 했다. 그 개는 주인을 못 알아보는 듯했다. 또 나는 이웃에 사는 성격 고약하고 도벽이 있는 친구 아이에게 늘 당하고 살았다. 어린 마음에도 억울했는지 얕은 상처로 남아있다.

  새할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했었나. 아마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이따금 쥐여주는 오천 원짜리 지폐를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아니, 엄마가 좋아했던 건가. 훗날 남동생이 태어나자마자 할머니는 나에게 주던 용돈을 딱 끊었다고 한다. 젖먹이에게만 만 원씩 쥐여주는 게 그리도 서운했다고, 엄마가 말해주었다. 그러니 이건 내 기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진짜, 진짜 최초의 기억은 아마도 이것이다.


  "민아, 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빠아......"


  나는 막 돌이 되었을 즈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했기 때문이다. 그 이혼 스토리도 아주 기구한데, 나는 아찔한 사고로부터 목숨을 건진 행운아라는 것만 우선 얘기해두겠다.

  엄마는 전화기 다이 앞에 붙어 앉아 신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불러 수화기를 귀에 대주고는 대뜸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는 순순하게 아빠라고 불렀다. 기껏해야 너댓 살 됐을 아이가 넉살도 좋지. 흔한 반항이나 의문도 없이 그렇게 넙죽 아빠라고 불렀다. 어색했지만 사실 쑥스럽고 좋았던 감정이 마음에 남아있다. 아버지가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린아이가 뭘 알았을까. 그런데, 뭘 알았으니까 이런 '불행 제2장'의 서막을 최초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아이는 참 많은 것을 안다. 완벽하게 인지하지는 못해도 돌아가는 상황과 분위기 정도는 능히 파악한다. 이것은 순전히 경험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 이론이다.


  아무튼,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통해 많은 근원적인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그날로 하고 싶다. 달력 앞에서, 나에게 희망이 생기던 날 말이다.




  2019년,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빈부격차를 뼈 아픈 비유와 블랙코미디로 버무린 작품이다.

  제목의 '기생충'은, 영화에서 가난한 인간을 뜻한다. 노골적일 정도로 인간을 흡사 '바퀴벌레'처럼 묘사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그 울렁임이란.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에, 하루종일 기분을 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나는 '가난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제목으로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처절할 정도로 솔직한 내 이야기를. 이 안에는 내 모든 정보가 최대한 솔직하게 묘사될 것이기에, 글만으로도 내 얼굴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개의치 않겠다.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솔직해져 본 적이 없다. 수많은 솔직하고 싶은 순간을 지나 뒤늦은 탄식에 젖어 생각한다. 글 말고 내가 진정 솔직해질 수 있는 수단이 또 뭐가 있겠는가. 이것이 가장 나답기에. 나는 쓸 것이다. 그 어떤 수치스러운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영화 <기생충>에서 '그 안'에 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내가 기생충이었으니까. 더는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 이것은 아름다울 정도로 진심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