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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Sep 14. 2023

The Real Me : D-47

100일 간의 진짜 나 끄집어내기 프로젝트 - 용기있는 포기


역시 나에게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건 참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게으르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매일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다. 진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을 정도로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정정하자면 나는 '똑같은 행위'를 매일매일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게 아무리 나에게 이득인 행위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은 사람이다.



D-62가 되던 날, 퇴사하겠노라 말했다.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엔 내 요구를 들어달라는 와일드 카드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미련 없이 말했다. 그 증거로 나는 '내가 아프다'고 말했다. 나를 좀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신들 말대로 내가 많이 아프니, 놓아달라고.

처음 인사팀 직원과 면담을 한 후 3개월이 걸렸다. 나로썬 꽤 오래 걸린 것이었다.

그간은 미련이 철철이었다. 사실 정말로 관두기 싫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 중 가장 관두기 싫은 회사였다. 여기엔 내가 전에 맛보지 못한 많은 창작의 기회가 있었다. 새로움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며 가장 많은 칭찬을 들은 회사일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시간들이, 내가 했던 작업들이, 사람들이 꽤 좋았다.


반면에 나의 창작 욕구는 눌려 있어야 했고, 작업물을 무시 당해야 했으며, 늘 자신을 의심해야했다.


회사에 내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어른이면 알아서 하라는 말도 들었다. 한참 어린 여직원을 질투하는 꼴불견이었다가, 괜히 나서서 피곤하게 만드는 일 욕심 많고 독단적인 사람도 되어봤다. 완벽한 자신에 취해 조언을 듣지 않는 사람도 됐다가, 피드백을 감정적으로 받아서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나는 기획과 창작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써 나는 최악의 직원이었다.

다만 그들은 나의 스토리텔링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여, 나를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2번의 퇴사 요구에도 다른 방식으로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나의 요구는 하나였다. 나의 팀장은 나의 업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나의 업무를 이해할 수 있는 상사가 있는 팀으로 옮겨주거나, 차라리 대표와 직접 소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느끼게 내 업무를 이해하는, 창작 능력이 있는 상사는 사내에 오직 대표 뿐이었다.

나와 소통을 한 임원진 A는 처음에는 무시로 일관했다. 전화로 대강 나를 타이르고는 내가 따로 말이 없자 그럭저럭 봉합이 된 것처럼 굴었다.

두 번째에는 진지하게 모두 들어주는 척 하더니 조직개편 중이니 좀 기다려보라고 했다. 조직 개편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땐 쿨하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사건이 터졌다.

새로 입사한 업계 경력 8-9년 차 제작팀 직원이 입사 약 3주, 워크데이 9일 만에 회사 돌아가는 꼴에 불만을 품고 온 직원에게 팀장 및 임원진 험담을 하고 패악을 부리고 다닌 것이었다.

나에게는 금요일 밤 10시에 전화해서 완벽해보이려 하지 말라는 둥,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둥,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둥, 피드백에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라는 둥 별 소리를 다하더니 내가 반박하자, 그렇게 잘났으면 실력으로 4대 대기업을 가면 되지 왜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냐는 것이었다.

이런 전화를 나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건 주말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나는 지난 6개월 간의 내 회사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경력직 직원 X는 그렇게 다음 월요일 아침 조회가 끝나기도 전에 회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뭐 말로는 자진 퇴사라고 하지만 반쯤 잘리듯 나갔다.

대표는 그녀가 많이 아픈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도 아프다. 누구나 아프다. 아픔을 해결하는 방식이 타인을 향하느냐, 나를 향하느냐의 문제겠지.

그 일을 계기로 대표와 나는 입사 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독대를 했다. 대표는 나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직접 지시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나를 너무 감싸고 도는 것으로 보여 대외적으로 곤란해질 수 있으니, 내 상사를 껴서 전달해야한다 임원진들이 그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표는 중간점을 잘 찾자고 했다. 기운이 빠졌다. 확실히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대표는 내게 큰 프로젝트 하나를 턱하니 맡겼다. 그리고 매일 아침 메일로 내가 진행하고 있는 사항들을 체크하고 피드백을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프로젝트는 나혼자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글로벌 프로젝트였기에 해외 제작팀이 붙고 출장을 밥먹듯이 가야할 큰 건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통째로 떨어졌다 생각하니 부담스럽고 압박되었다. 난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같이 일할 팀을 꾸려달라는 거였지 너 혼자 다 해라. 라는 게 아니었다. 이 와중에 크리에이티브팀을 꾸리겠다고 했다. 나는 물론 포함이 되어 있었다. 대표는 자꾸 공개적인 전사 메일로 나를 칭찬했다.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입사 초에는 직원들이 대표님 메일에 왜 그리 오버 액션을 하고 목을 메나 의아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대표님의 칭찬 메일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일이 잘 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대표님이 메일로 지적을 하면 과도하게 신경이 예민해지고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메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그런데 이제는, 칭찬 메일도 싫고, 힘들고, 숨이 막혔다.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 임원진 B는 나를 따로 불러 퇴사한 직원 X와 나눴던 대화를 꼬투리 잡아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직원과 회사 뒷담을 나눴다는 게 나의 죄목이었다.

나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팀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심성이 나쁘지 않은 것’과 별개로 무의식 중에 가진 텃세들이 있다.

일 년 전 팀장이 이 팀에 올 때, 팀에는 사회 초년생, 즉 이 회사가 첫회사인 직원 1, 2, 3이 있었다. 전임 팀장과 함께 그 전에 있던 직원들이 싹 다 나가고 버려지듯 남았던 초년생 1, 2, 3은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해 무너질 뻔한 팀의 구심점을 잡아준 이번 팀장을 마치 신처럼, 구원자처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팀장이 부족한 점을 조금이라도 말하려고 하는 팀원이 있으면 눈에 불을 켜고 방어를 하고, 마치 팀장의 대변인인듯 행동했던 것이 나중에야 이해가 되었다. 또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자신이 사적으로 팀장과 친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어필하는 직원도 있었다.

팀장은 무심결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팀원들 위주로 빠르게 컨펌을 내줬고, 그 외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게 굴었다. 나는 세어보니 12개의 프로젝트 중 3개만 최종 업로드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간에 드롭되었다. 초년생 1, 2, 3이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기존 방식만 고수하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 무시하고 벽을 칠 때, 이런 어려움을 팀장에게 토로하면, 그들과 밥이나 술을 먹으며 인간적으로 친해지라고 권했다. 이런 안에서 내가 있는 6개월 사이 직원이 4명 관두었고 그 중에 2명은 우리 팀에 2주도 안 되어 나간 것이었다.

직원 X는 어쩌면 나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X가 입사하고 3일 만에 우리는 처음 대화를 텄는데, 그녀는 이미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 초년생 세 명(1, 2, 3)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있고 너무 독단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3일 만에 그런 부분을 다 알 수 있나 싶어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가는 반가움이 있었을 것 같다. 그녀는 임원진에게 말해서 그 3명이 있는 한 자기는 이 팀에서 어떤 조회수나 실적도 내기 힘들다고 말하겠다, 흥분해서 말했다. 그들을 내보내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 그녀를 진정시켰다. 어쩌면 그들의 열정페이로 돌아가는 회사인 것도 아직은 맞았다.


이후 상반기 리뷰를 하고 하반기 방향성을 설정하면서 팀장은 팀장답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나는 X와 몇 번 술자리를 하며 팀의 방향성,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서 답답함을 토로했었다.

직장인이 회사를 걱정하는 건전한 술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서로를 바라보며 으쌰으쌰해보자, 아직은 더 버텨보자 다짐도 했더랬다.


그러다 어느날은 나도 X의 심기를 건드리게 됐었나보다.

이 사건은 하도 지졸해서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감히 나의 작은 실수 따위가 그녀의 과민하신 어떤 부분을 또 건드렸겠지.

아무튼 그날 이후 그녀는 나와 대화를 끊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1대1 면담을 했다.

팀장 지시에 의해 제작 업무 프로세스를 짤 때 내 역할을 철저히 배제했다.

(내가 기획팀인데 기획 업무에서 나를 빼더라)


그런데 X와 짝짝꿍이 맞았던 며칠의 순간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가 퇴사하며 뿌리고 간 (경위서)를 근거로 나에게도 경위서를 쓰라고 한 것이었다.


그래. 경위서. 그 경위서만 없었어도. 나는 퇴사를 하지 않고 지금까지 미련을 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위서만은 죽어도 쓰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경위서 덕분에 나는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임원B가 나에게 경위서를 쓰라고 하고, 이 일은 모든 사건의 마무리라고 했다. 더 이상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자기도 대표님 뒷담 깐다고.


나는.

이 회사에 남고 싶었다.

더 일해보고 싶었다.

더 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죽도록 발악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찾고 싶어서.

그래요. 로소 씨. 당신 정말 힘들었겠네요.

그래도 우리 힘내봅시다.

회사가 참 이래서 걱정이네요.

그래도 우리 이렇게 이렇게 개선해 봅시다.

당신이 하는 이 일이 잘 진행이 안 되네요.

뭐가 문제죠?

같이 이런 부분 고민 해보고, 이런 건 같이 해결해 봅시다.

로소 씨는 이런 부분이 약하니까, 이런 건 팀이 같이 해봅시다.

이번 일은 고생했습니다. 다음에는 더 잘해봅시다.

나는 그냥 그런 팀에서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혼나고 깨지더라도 같이 해보고 싶었다.

넘어져도 같이 일으켜 세워줬으면 했다.


너 잘하나 보자.

얼마나 잘하나 보자.

거봐라 너 내 그럴 줄 알았다.

니가 하고 싶어 한 거잖아. 그러니까 니가 해결해야지.


그냥 내내 혼자 일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말을 믿는다. 우리가 굳이 회사에 들어가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하고, 또 우리의 불완전함이 마치 퍼즐과 같아서 서로 끼워 맞추면 오히려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서로 모여드는 거라고.

하지만 어쩌면 회사는 사람이 모여드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 그만 인정해야겠다.

하루 8시간 점심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 9시간을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주 45시간, 월 180시간, 연 2,160시간 얼굴 마주하며 서로 인간 대 인간으로써, 마냥 사랑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회사’는 그럴 수 있다며, 회사는 돈 버는 곳이라며, 회사는 원래 비인간적인 곳이라며

사람들 모이는 곳이서 사람 냄새 안 풍기도록 철저하게 구는지도.


나는 지금 퇴사를 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상태다.

팀장과 마지막으로 했던 퇴사 미팅, 그리고 송별회처럼 했던 마지막 회식도 기억에 남아서

이건 나중에 썰로 풀어야 겠다.


결국 100일을 미처 다 채우지 못 했다.

그러나 이 고민은 100만에 마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짜 나는 오래오래 찾아야 하는 미션이다.

내 어리광은 여기까지다.

나는 또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한다.

우선 9월까지는 나에게 휴식기를 주기로 했는데, 그마저 잘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버텨보려 한다.

나의 불안에게, 작은 메세지를 띄운다.

아직은 괜찮다고.


나는 심리상담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3회차 상담을 나갔다.

책쓰기 모임도 시작했다.

작은 연극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더 좋아지고 있다.

모든 게 나아지고 있다.

행복은 도처에 있다.

내가 너무 멀리 돌아가지만 않으면.



- 2023. 09. 14 / D-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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