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가난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로소 Jan 27. 2024

7. 잠길 수도 있는 지형

기억 건져올리기






아끼는 수첩이 하나 있었다.


여덟 살 때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 수첩에 무엇을 써놓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수첩만 생각하면 아직도 막연히 아깝다.


가끔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 같은 감각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1998년 8월, 여름의 그날 밤이 그랬다. 눈을 뜨니 집안은 조용했으나 어른들은 부산스러웠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지붕을 내리누르는 폭우의 괴성이 먼저 들렸다. 현관문턱을 넘실대는 구정물과, 마당을 뱅뱅 돌며 떠다니는 내 슬리퍼가 보였다. 나는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기 시작할 때의 끙끙거림도 없이 바로 터진 울음이었다. 눈물보다 소리가 앞선 울음. 무언가 챙기기에 바쁜 어른들은 빗소리 때문인지 내 울음을 듣지 못했다. 나는 ‘우리는 곧 죽을 거야’라는 말 대신 그렇게 울어댔다.


우리는 언덕 위에 있는 중학교로 대피했다. 그때까지 중학교는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중학생이라는 미래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 곳은 무서웠다. 운동장의 벌건 진흙이 자꾸만 내 발을 잡아끌었다. 건물 안에는 축축하게 젖은 표정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걱정의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엄마는 짐을 풀어보며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을 아쉬워했고 할머니는 우는 동생을 업어 달래고 있었다. 그 곳은 추웠다. 아이들에게만 나눠준 몇 장의 담요는 따듯하기는커녕 까슬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껴안을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안길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안을 여력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여전히 울먹였지만 울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밖으로 살살 나가보았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보고 오겠다던 몇몇 어른들을 굳이 따라 나선 것이었다. 내리막길에 매달려 바라보니 발간 구정물이 언덕의 종아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마치 언덕이라는 미끄럼을 내려가면 있는 풀장 같았다. 그 때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풀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나에게 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이처럼 떼쓰는 아주머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의 엄마가 나지막이 ‘따라오지 말라니까’하며 짓던 그 표정. 그것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누군가가 고무보트를 타고 구정물 위를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겨버린 그 아래로 무엇이 파묻혔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다. 며칠 후 학교에 가니 수해를 입은 집 아이들에게만 학용품을 잔뜩 넣은 잔스포츠 가방을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가방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했다. 나는 짙은 녹색의 그 가방이 너무 칙칙해서 정말 싫었다. 그 안에 든 학용품도 다 구려 보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때 불현듯 주황색 글자들이 떠올랐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 수첩에 나는 늘 형광주황색 펜으로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었다. 그 수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때서야 생각이 난 것이다. 수첩의 생김새가 떠올랐고, 펜에서 나던 향기도 떠올랐다. 그동안 어떻게 잊고 있었나, 황당할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수첩에 대체 무엇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을 온통 뒤졌지만 수첩은 없었다. 떠내려 간 물건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누군가가 다 젖어버린 그 물건을, 다른 젖어버린 물건과 함께 버린 것이리라. 그날 밤 나는 여덟 살 치고는 꽤 늦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거대한 물줄기를 타고 떠가는 그 수첩만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그 안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비밀일기장의 열쇠를 잃어버린 기분. 주저앉아 울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 아주머니는 무엇을 잃었기에 그렇게도 울었을까. 적어도 잔스포츠 가방은 아닐 것 같았다.


사회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파주시 지도를 펴놓고 이번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정말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온 지구가 우리 집만큼 잠겼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피해가 없는 곳은 아파트 높은 층이나 언덕 위에 있는 집들뿐일 거라고. 그런데 내 생각보다 피해지역은 너무나 좁았다. ‘우리 동네 입구와 출구에 투명한 벽이라도 생겼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좀 화가 났다. 여덟 살의 나는 ‘잠길 수도 있는 지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후로도 몇 번 우리 집은 잠길 뻔했다. 대문 앞 디딤돌까지 물이 차오르는 일은 다반사였다. 참으로 대책 없는 동네였으나 우리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비가 범상치 않다 싶은 날이면 어른들이 돌아가며 밤새 집 앞 냇가의 수심을 체크했다. 나는 비가 오는 날에는 병적으로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했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는 울다 지쳐 잠든 적도 있었다. 두렵다 못해 정말 지긋지긋했다. 결국 댐과 수로시설을 갖춰 홍수걱정은 사그라졌지만 그 이후에도 몇 년은 비가 너무나 싫었다. 계절이 계절을 더해가고 시간이 시간을 쌓아가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비는 최악이다.”라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어느 날부턴가 나는 빗소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빗소리 들리는 창가에서 이불을 온몸에 돌돌 말고 앉아있으면 더 없을 만큼 안정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비에 발끝이 젖는 기분이 좋아졌다. 비오는 날에 신고 싶은 신발을 사두기도 했다. 또 그 얼마 후에는 우산 사이로 비가 새는 것이 좋아졌다. 폭우 속에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 우산을 쓰고 서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정수리나 코끝에 빗방울을 맞으면 괜히 웃음이 났다. 그리고 며칠 전, 가벼운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생각했다. 이러다 결국에는 빗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굳이 죽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좋아하는 것에 달려드는 것은 내가 동물이라는 증거라서 좋다. 불쾌한 신경쓰임이, 때때로 나를 증명해주는 감각이 되기도 한다는 걸 나는 그렇게 서서히 느껴갔다.


수첩의 존재도 그랬다. 애초부터 거기에 대단히 좋은 글귀가 쓰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그냥 잊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잊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내용보다는 잊어지지 않는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홍수가 빼앗아간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는 그 수첩. 더듬더듬, 나는 그 존재의 의미를 찾아나갔다.


열 살 때 처음 썼던 시를 기억한다. 그 당시 ‘쓰기’ 수업 시간에 쓴 것이었다. ‘오늘 밤 여름이 나를 밟고 지나갈 거야’라고 시작하는 이 시는 담임선생님의 눈에 들었다. 선생님의 칭찬이 간지럽고 설랬다. 그 해 가을,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시(市)에서 열리는 율곡문화제에 참가했다. 그 어린 날 나에게 자운서원은 소풍이었고 가을 그 자체였으며, 글쓰기는 함께 놀러간 친구였다. 그러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글쓰기를 그렇게 시작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는 여름을 얇은 이불 한 장위로 느끼던 내가 그것을 종이 위에 꺼내놓을 수 있는 힘은 그 수첩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시절 어린 내가 서툰 솜씨로 써내려가던 글자들 속에 많은 감정의 씨앗들이 있었기에 지금껏 이렇게 무언가를 쓰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1998년, 나는 대홍수를 겪었고 그 홍수에서 남은 것은 오히려 잃어버리고만 그 수첩이었다. 그때 우연히도 나는 여덟 살이었고, 적어도 여덟 살 때부터는 무언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빗물에 젖어버린 슬픈 기억의 상징물에서 나의 역사를 증명하는 하나의 단서로, 의미가 변화된 순간이다. 이렇듯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어린 날의 나를 찾아가고 대화를 걸어보는 일은, 내가 다시 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렇게 ‘그 물건을 잘 간직했어야 했다’는 아쉬운 한숨은 조금은 애틋함이 깃든 따듯한 온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여덟 살짜리를 떠올리면서 내가 ‘잠길 수도 있는 지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누군가는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지형을 가졌지만, 나는 쉽게도 쌓이고 모아지고, 그득그득해지는 지형을 가진 거라고. 떠나보낸 수첩 몇 쪽도, 이후 내가 사 모으기 시작한 노트와 펜들도, 잃어버리지 못해 품고 사는 수많은 쓸모없는 물건들도, 그것들이 혼돈의 질서를 이룬 내 방도 모두 그 지형의 다른 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낡은 집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려 방바닥에 받쳐둔 갖가지 크기와 색깔의 바가지, 양동이, 밥그릇과 같은 것이다.


불행과 공포도 나에게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후 더욱. 아무것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해서 내 안에 묵직하게 담아둔다. 그리고 그것이 이리저리 섞이는 기분을 즐기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이 싫다가도 좋아질 수가 있는 거고, 계속된 물난리의 공포 속에서도 이사를 가지 않던 우리 가족을 이해할 수 있으며, 내가 잃어버린 그 수첩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런 지형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행복한 미소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폭발하듯 쏟아지는 비를 받아낼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원망대신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나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고나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채워놓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구정물이라도 나는 기꺼이 뛰어들겠다.


오늘도 나는 가슴에 고인 한바가지 물속에 빠져 죽는 상상을 하며, 헤엄친다.







사진 Unsplash @Wolfgang Hasselmann

  

  

매거진의 이전글 6. 내 안에 방방 뛰는 어린아이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