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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Apr 01. 2024

8-1. 독촉과 청구서

부담 혹은 책임


정신을 차릴 때마다 내가 원하던 내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20대 중반이 지날 무렵, 한창 사회생활을 활발히 할 나이에 나는 카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벌이보다 큰 소비벽 때문이었다. 나는 무언가 갖고 싶으면 참는 법이 없었다.


옷은 이미 충분히 많은데도 계속해서 사들여서 거대한 서랍과 행거에서 흘러 넘칠 정도로 꽉 찼다.

TV에서 보던 예쁜 집을 가질 수는 없어서, 어디서 주워본 인테리어 소품으로 대리만족했다.

다이소에 가면 자질구레하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도 끊임없이 사들였다.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틈만 나면 약속을 잡고 술자리를 만들었다.

어려서 친척들에게 의지해야만 갈 수 있었던 여행을 내 선택으로 갈 수 있게 되자, 무리하게 다니며 계산 없이 돈을 썼다.

특히 내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 더 심해졌다.


퇴근길에 다이소에 들러 뭐라도 사고 나면 숨통이 트이는 그 기분. 예쁜 옷을 사면 마치 나의 가치가 올라간 거 같은 느낌. 택배를 기다릴 때의 초조함과 설렘. 주문한 온갖 옷을 입어볼 때의 격앙감. 내게 잘 맞지 않는다며 반품할 때 느꼈던 안도감. SNS에 올라오는 온갖 광고를 보면 당장 그 물건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 세일할 때를 놓치면, 품절되기 전 이 타이밍을 놓치면 손해 보는 거라는 압박감. 결제를 누르고 나서야 해소되던 불안들.


그런 생활을 몇 년 간 반복하니 내 인생은 두 가지로 점철되었다. 독촉과 청구서.

나는 카드사에서 수도 없이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도 카드값을 연체하고 있었다. 내가 비정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족에게 도움도 청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너 달을 보내고 나니, 자려고 누우면 눈물이 흘렀다. 매일 밤 몰래 훌쩍였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의 공포를 알아봐 준 질문에 눈물이 터져 대답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다가, 결국 고백을 했다. 얼마 간의 카드값을 갚지 못해 매일 독촉 전화를 받고 있다고. 엄마는 나의 카드값을 대신 갚아주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의 장부에 오늘 ‘딸의 카드값’이 올라가 있을 거란 걸. 그 후로 몇 년 간 엄마는 그날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때 내준 카드값은 갚지도 않고…“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나에게 그만큼의 여윳돈이 생긴 적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다. 어떤가, 한심한가?


얼마 전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족끼리 일본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내년 봄에 가자고 말했다. 몇 개월 간 돈을 모아보겠다고. 동생은 최근에 사고 합의금으로 받은 돈이 있지 않냐며, 그 돈의 3분의 1을 쪼개서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 돈은 따로 쓸 곳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누나는 혼자 일본 간 적 있잖아. 엄마는 한 번도 못 가봤고. 갑자기 왜 불쌍한 척이야?”


7년 전,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오사카와 후쿠오카에 각각 다녀왔다. 이후 출장으로 두어 번 더 일본을 다녀왔었다. 알고 있었다. 일본 여행을 다녀왔을 때 엄마도, 동생도 가보지 못한 일본 여행을 혼자 다녀온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엄마에게 돈도 갚지 않은 주제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죄’ 때문에 오늘에 와서 ‘사고’로 받은 합의금을 마치 몰래 숨겨 놓은 돈 취급 당하며 빼앗기는 것이리라.


’ 맡겨놨어?‘


라는 말이 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듯이 요구할 때 비꼬듯 일갈하는 표현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빚을 지고 살았다. 친척들에게, 친구에게, 동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시기로 유명한 방앗간 집 아주머니에게(대학 등록금을 지원받았다), 국가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여자 혼자 두 아이를 키웠다. 친척들을 포함하여 일명 ‘온마을의 도움‘이 있었지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나에게도, 엄마와 친척들에게도 너무 중요한 사실이었다. 엄마가 나를 낳고,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에 맞먹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을 내가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가는 한 늘 엄마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 할머니와 친척어른들에게도 딱 그렇게 보였다. 저 불쌍한 집안. 불쌍한 내 딸. 그리고 나는 이렇게 바라봤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아이. 부모에게 보은해야 하는 아이.


‘엄마에게 잘해야지. 너희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리하여 나에게도 엄마를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받은 장학금, 아르바이트로 번 돈, 모두 한 치의 의심 없이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엄마에게 더 많은 것을 줘야 했다. 내가 주는 것들은 플러스마이너스 계산 법칙에 의해 허공에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엄마에게 매일 같이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었다. 도저히 전부 값을 길이 없었다.


한편, 엄마, 나, 동생 세 식구는 언제나 깍두기였다. 명절에 제사를 지낼 때,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갈 때,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온 가족이 휴가를 갈 때 비용은 모두 큰외삼촌이나 이모 댁에서 부담했다. 우리 엄마는 설날에 사촌들에게 세뱃돈 한 번 줘본 적이 없었다. 대신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명절이면 바쁜 며느리들을 대신해 할머니와 엄마가 새벽부터 음식을 했다. 남편 없는 딸이 편한 건지, 엄마가 살가운 딸이어서 인지, 할머니는 자잘한 일에도 늘 엄마를 소환했다. 남편 없는 딸의 딸은 어쩌면 더 편했는지, 나보다 더 사촌 동생들을 두고도 꼭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도 난 좋았다. 내가 그들에게 좀 더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자꾸 내 이름을 불러 대는 게 좋아서.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친척들과 모이면 혼자 빈 방에 들어가 우는 날이 많아졌다.


콩쥐처럼 미움과 구박을 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애틋하게 여겨주셨다. 용돈을 주고, 졸업식에 와주고, 자전거며 MP3며 핸드폰을 사주고, 가족 여행에 데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예뻐해 주는 동안 나의 시간을, 나의 사춘기를, 나의 사유를, 나의 취향을, 나의 자존심을 침해당했다. 때때로 갖고 싶은 물건을 엄마에게 사달라고 하면 ‘삼촌한테 졸라 봐’라는 말을 들었다. 의식주 외의 대부분의 것들은 내 부모가 아닌 주변인들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 무엇 하나 당당하게 갖지 못했다. 디자인이나 기능들이 마음에 쏙 들지 않아도 감동받아야 했다. 내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 눈치를 봐야 했다. 때때로 그것들을 받기 싫었다.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나에게 거부권이 있던가? 그들이 불쑥 사서 내미는 것들을 받아내며 내 마음에 거대한 청구서 항목이 채워졌다.


그래, 어쩌면 태어난 자체로 ‘빚’을 진 것은 아닐까? 마이너스로 시작한 인생에 빚은 잘도 불어났다.


맡겨 놓은 거 없이 받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반대로 나에게 맡겨 놓은 것이다. 맡겨 놓은 것들을 돌려줄 차례가 자꾸, 자꾸 돌아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서운해하거나 나를 괘씸히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그 감정이 나에게 날아와 독촉이 되었다. 그중에는 내 피해망상이 만들어낸 거짓된 독촉도 있었다. 내가 나를 가장 닦달하고 있었기에.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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