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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Apr 01. 2024

8-2 독촉과 청구서

물건과 소유


돈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반드시 어떻게든 빠져나갔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본가에 가면 꼭 한 번 이상 돈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보일러 기름 값이 얼마가 올랐다. 이번 달에 또 월급이 밀렸다. 곧 모자가정 지원으로 받은 ’전세 지원금‘을 빼앗기면 우리는 거리에 나앉을 거라는 말까지. 엄마는 내 얼굴을 보면 돈이 떠오르는 듯했다. 엄마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그러리라. 역시 머리로는 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곧바로 빚꾸러기가 된다. 맡겨놨어?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만… 그래, 그녀는 이미 내게 많이 맡겨 놓았다. 단 5만 원이라도, 10만 원이라도 가진 것을 털어 넘긴다. 그렇게 나는 빈털터리가 된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엄마 생일이 돌아오고, 동생 생일이 돌아오고, 설날이 돌아오고, 어버이날이 돌아오고, 여름이 오면 가족과 여름휴가를 가고, 가을이 오면 또 명절이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남들이 누리는 행복은, 비슷한 흉내를 내서라도 누리고 싶어 했다. 해야 할 도리도 모두 수행해야 했다. 나도 그것이 싫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살았기에 우리가 버틸 수 있었음을 안다. 내내 비참하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다만 돌아서면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 저만치 멀어지고 있다.


청약에 당첨되어 영끌해 집을 샀다는 직장 동료에게. 퇴사하게 됐다 고백하는 내게 ‘잘했어. 그래도 모아 놓은 돈이 조금은 있을 거 아니야. 그걸로 버티면서 일 알아보면 되지’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여전히 순수 예술을 하고 있는 선배 혹은 동기에게. 매월 100만 원씩 적금을 들고 있다는 지인에게. 그래도 안정된 직업을 택했으면 좋겠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는 애인에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게 독촉, 독촉, 독촉이다.


이제 더는 엄마에게 카드 값을 갚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게 내 최선의 최선이었다. 나 하나만 잘 건사하는 삶. 그러나 그것도 현재에 한정된 이야기다. 당장 내일도 청구서에 깔려 죽을 수 있다. 아니, 언제라도. 내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엄마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런데도 엄마에게 나는 ‘더 이상 카드 값을 갚아 달라고 하지 않는 어엿한 딸’이 된 걸까? 엄마는 나에게 돈 이야기할 틈을 찾는다.


내 것은 ‘물건과 경험’뿐이었다. 여행이나 학원에서 얻은 경험은 타인이 빼앗지 못하는 것이었다. 물건도 비슷하다. 나의 몸에 꼭 맞는 옷, 내 방에 장식된 갖가지 물건들. 책들. 열심히 사 모은 내 취향이 흠뻑 묻은 물건들. 이상하게도, 이런 물건들은 쉽게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돈을 보면서 ’이 돈, 소중한 거야?‘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데 물건에는 의미 부여를 참 잘한다. 나는 그 의미를 이용해서 내 물건들을 지켜냈다.


“그건 선물 받은 거야. 못 줘.”


반대로 말하면 그런 명분 없이는 내 것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면 응당 줘야 할 것처럼 느낀다.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돈 대신 ’내 소유물‘을 만드는 것도 어쩌면 참 소극적인 방어였다. ’이건 달라고 안 할 거지? 이거 너에게 필요한 물건도, 네 취향도 아니잖아? 이건 너에게 맞지 않잖아?‘ 라는 물음이다.


돌아보면 내 물건, 돈, 시간, 모든 것이 마치 공공재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빨리 쓰지 않으면, 누군가 먼저 써버릴 것이다. 나도 나에게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돈을 아끼는 법도, 돈이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잘 모르게 된 것 같다. 돈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주고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다. 사람들이 뺏어갈 수 없는 걸로. 엄마도 동생도 누구도 탐내지 않는 걸로. 그렇게 바꿔 놓고 나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나의 영혼에는 무언가를 소유할 품이 없었다. 그래서 어설프게 받고 거의 돌려주지 못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른답게 돈을 모으고 미래를 꾸려가는 대신 당장의 ’충족감‘을 택하며 어떻게든 버텨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보다, 살아있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살아내는 것은 청구서를 받는 일이다. 청구서는 자꾸 나를 과거에 살게 했고 어떤 날은 내가 전생의 빚을 갚고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전생의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토록…


반면 독촉이라는 ‘차가운 손’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내 발목을 잡곤 했다. 황홀한 꿈에 취해보려 했던 날에도, 스스로가 조금 좋아질 뻔한 날에도,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 벅찼던 날에도 그 서늘한 감각에 다시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한 순간도 독촉의 그림자가 나를 붙잡지 않은 날이 없다. 한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다.


버텨온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숫자로 남는 것은 서러운 일이나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라고 자기 연민에 빠져 변명하기도, ‘정신 차리자’하고 나를 다그치기도 하지만, 절대로 ‘그러지 말 걸…’ 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기‘라는 선택지는 과거의 내게 없었으니까. 그건 생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오늘에 와서 후회대신 그저 차분히 나를 들여다본다. 당장 멈추라거나 이제 충분하다 다그치는 내면의 목소리도, 달랜다. 나를 고장 난 물건처럼 고치려고 드는 세상의 시선도 다른 곳으로 돌려본다. 나의 이유를 발굴하고 이해해 본다. 충분히 보듬어본다. 이 글을 쓰는데 아주 오래오래 걸렸듯이. 나는 나를 기다려 준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방법대로, 당장 어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하던 대로 계속하면서 들여다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을 다루는 일은 참으로 고행스럽지만.


사람은 태어나서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고 또 피 흘리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작은 상처도 하루아침에 아물지 않듯이 신경 써주지 않으면 금세 덧나듯이. 조금 더 나의 마음에게 마음을 쓰자. 이토록 잘 버텨준 나의 마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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