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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Aug 18. 2018

지독하고 고단했던 콜롬비아 전쟁의 역사

부적응의 보고타, 거슬러 올라간 내전 이야기


지독하고 고단한


이 나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의 인식은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피의 역사에 기초한다. 악명이 자자했던 마약 카르텔의 무자비하고 몰상식한 횡포만이 전부가 아니다. 콜롬비아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격렬한 정치적 대립 속, 숱한 싸움과 상처를 누적해 가며 20세기를 맞이했다. 이데올로기, 독재와 부패, 내전과 혁명이라는 낯설지 않은 현대의 초석. 이들의 지독하고 고단한 현대사는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지역 카우디요(스페인 및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의 정치 야망과 지역 간 연결을 어렵게 하는 자연적 환경은 ‘시몬 볼리바르’의 큰 그림이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통합을 불가능하게 했다.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분리 독립을 선언한 일시적 통합국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간의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시작된다. 양당의 반복된 집권 속 시행된 경제 정책은 실패했고, 빈부 격차는 해소되지 않았다.


중앙 정부의 지위가 약화되자 각 주는 자체 군대를 육성했고 1880년 집권한 보수주의 대통령 ‘라파엘 누녜스’의 중앙 집권적 정책은 한동안 지속된 분열의 긴장을 가속화 했다. 1899년, 그렇게 콜롬비아는 보수주의 정부군과 무장 자유주의자들의 전쟁으로 20세기의 서문을 열었다.


‘천일 전쟁’의 승자는 없었다. 전쟁은 십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콜롬비아 정부는 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미군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영역 곳곳에 미국의 개입을 차단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약 30년간 이어진 보수당의 장기 집권 아래에서 ‘영웅적 노조’의 시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으로 노동자가 새로운 정치 행위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출처: 콜롬비아 내전 52년 만에 종식, 경향신문, 2016.08.25.



몸통에 비해 유난히도 작은 머리를 가진 나라에서 몸통의 생존기는 언제나 지독할 수밖에 없다. 머리는 그 크기에 반비례하게도 강한 힘과 묘수를 지녔고, 통제자의 위치를 점령한 머리의 싸움은 몸통의 삶을 고단하게 하기 마련이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조를 결성해 움직였고, 보고타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이 사회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소수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제권을 원하는 보수당 정부와 노동자 간의 첨예한 갈등은 예고되었다.


1948년 4월 범아메리카회의 개최 중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이 암살당하며 갈등은 폭발한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호르헤는 사회 비주류, 혜택의 영향권 밖에 놓인 이들의 지지자였다. 1년간 보고타 시장으로서 교육과 보건 및 환경 개선에 힘썼던 그는 아웃사이더의 표상이었다.


호르헤 암살 사건 이후 그의 유산을 파괴하기로 결정한 정치 핵심 인물들에 분노한 시민들은 보수당과 교회의 상징물을 파괴했고, 무장 경찰까지 가담하면서 이틀 사이에 2천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른바 ‘보고타 사태’라는 사상 최악의 도시 폭동이 발발한 것이다. 노동자 및 농민 계층과 무장 정부군의 대립은 콜롬비아 내의 뿌리 깊은 빈부 격차의 표상이자 과두 정치의 민낯이며, 이데올로기 대립의 양당 정치가 빚어낸 참상이었다.


보고타 사태는 시작에 불과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2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폭력의 시대’가 콜롬비아 전역을 덮쳤다. 정부군과 자유당 소속 무장 집단 간의 대결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립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자유당이 게릴라 단체를 조직해 반정부적 무장 활동을 이어가면서 인명 피해는 계속되었다.


출처: El trauma de la violencia en Colombia, ABC international, 2016.09.28.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는 그 혼란을 틈타 집권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로하스 피니야’의 집권과 동시에 자유당원인 게릴라들을 사면했고, 호의적 태도로 무장 집단의 활동을 평정했다. 국민의 지지를 얻은 로하스 피니야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아닌 제3당의 결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당 체제 정치계의 외면과 견제, 국제 시장에서의 커피 가격 하락에 따른 경제 위기는 그의 시도를 무력하게 했다. 여기에 군부 세력의 학생 시위 발포 사건과 언론 탄압까지 더해져 로하스 피니야는 보수당과 협력한 자유당에 의해 끌어내려 진다.


이후 반로하스 연합에 따라 ‘국민전선’의 구축이 시도됐다. 선거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자 보수당과 자유당이 번갈아 집권한다는 단순하고도 독재적인 양당 체제의 후진적 연립 정부가 형성된 것이다. 협력의 시대를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두 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하고 재분배하고자 했다. 결과는 또다시 머리의 독식이었다.



출처: Stratfor 2016


출처: KIDA 세계전쟁 데이터 베이스


두 당의 정치 협력은 새로운 형태의 반체제 폭력을 촉발했다. 배제된 자들의 혁명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ELN(민족해방군)’과 ‘FARC(콜롬비아 혁명무장세력)’은 그중 대표적인 게릴라 조직이다. ‘비르힐리오 바르꼬’ 정부가 무장 조직에 평화 협상을 제시했던 1988년, 이들의 주도권은 최정점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국민전선은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간 고인 물의 끈적이는 흔적, 그 비릿한 악취를 걷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부정부패와 반정부 게릴라의 무장 운동, 부채 위기와 마약 카르텔의 강세는 정치 폭력을 재등장시켰고 대통령 후보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신뢰를 상실한 정부는 마약 카르텔, 게릴라, 민병대의 삼각 갈등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사회의 폭력 수준은 날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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