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바꾸기로 한 순간
아이 문제 앞에서
나는 오래 버텼고, 충분히 애썼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꼈을 때에야
비로소 멈췄다.
하지만 그 멈춤은 포기가 아니었다.
아이를 덜 숨 막히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 자신을 더 이상 소모시키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향 전환이었다.
이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칠 즈음,
친하게 지내던 친구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 가장 먼저 무너진 건 감정이었다.
화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학교를 당장 그만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등학교는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엄마니까 버텨야지’,
‘지금이 고비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원래 참을 만큼 참고, 할 만큼 해보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단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상황이 명확해지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졌다고 해서
그 시기가 덜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끝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며
그저 일상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고 믿었던 행동들 중에는
사실 나를 가장 소모시키는 것들도 있었다.
아이의 마음이 다칠까 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며
모든 감정과 상황을 과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는 분명했다.
나와 아이가 아무리 애써도
학교와 친구, 주변 환경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였다.
매 학년, 따돌림은 반복되었고
시기와 질투는 형태만 바꾼 채 계속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 분명해진 것이 있다.
타인은 생각보다
나와 내 아이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내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고,
이 아이에게 맞는 길을 찾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외부의 평가나 시선은
더 이상 기준이 될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선택의 기준을 바꾸었다.
‘더 잘하는 쪽’이 아니라
아이와 내가 덜 힘들게,
오래 갈 수 있는 쪽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도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운 적은 없었다.
그저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둥글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길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조차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선택 이후,
나의 하루는 훨씬 편해졌고
마음은 더 당당해졌다.
다만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만큼,
앞으로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 감정 하나만 남기고 싶다.
괜찮다.
정형화된 틀에 모두가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거기에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내 속도와 내 방향에 맞게,
꾸준히 걸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