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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Feb 18. 2021

아들이 어른이 되기 싫다고 했다.

5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매해 12월 말만 되면 “내년이 되기 싫어!”, ”6살이 되기 싫어!”, “엄마! 7살이 안 되는 방법은 없어?” 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한동안 콩도 먹지 않았다. 콩을 먹어야 키가 큰다는 얘기를 듣고는 “콩 안 먹을 거야!”하며 울기 일쑤였다. 키를 재고는 많이 컸다고뿌듯해하며 녀석에게 말을 하면 “나 키 많이 컸어?”하고는 이내 눈물을 글썽이고는 우울해했다. 새해 떡국 먹는 것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다. 떡국을 먹고는 한 살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피터팬을 읽고는 어떻게 하면 피터팬처럼 어른이 안될 수 있냐고 묻는다. 어른이 되기 싫은 아이는 피터팬이 살고 있는 네버랜드로 가야 한다고 하니, “네고 랜드 가기 싫어!!!!”하며 또 울음을 터뜨린다.

형아가  되기 싫어?”
그냥 형아 되기 싫어. 크기 싫어.”

12월만 되면 반복되는 대화이다. 아이는 아직 표현이 서툰 탓인지 대화를 나눌 용기가 없는 탓인지 “그냥”이라는 것 외에는 아이에게서 어떤 이유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큰 애에게는 “이거 먹으면 키가 커져.”, “이거 하면 힘이 세져!”식의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아이는 자라는 걸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6살 때 어렴풋이나마 아이의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도 해가 바뀌는 연말이 가까워졌을 때였을 것이다. 2020년보다 2021년에 더 즐거운 일이 많을 것이라며 아이를 설득하고 있을 때였다.아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엄마.... 내가 어른이 돼도 엄마는 나랑 같이 있는 거야?”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아이가 자라고 힘이 세지고 어른이 되면 그 부모는 노쇠해지고 언젠가는 결국 소멸한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 죽음, 그리고 상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에겐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려줘야 할지 몰랐다. 아이가 좀 더 크길 기다려야 할지, 아님 내가 아이가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말할 지혜를 먼저 갖춰야 할지 몰랐다.

유준이가 어른이 되어도 엄만 유준이 옆에 있지~ 봐봐. 엄마가 어른이 되어도 할머니가 곁에 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유준이가 어른이 돼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알았지?”

그러나 여전히 아이의 의문과 두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나 보다. 몇 달이 지나 2021년을 곧 앞둔 어느 날 길을 걷다 아이가 묻는다.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 내가 15살이 되면 엄마는  살이야?”
엄마는 그땐 50살이지.”
그럼 내가 50살 되면?”
그럼 엄마는 85살 되지.”
그러면 내가 85살이 되면?”
“그땐 엄마가 100살이 넘겠는데?”
사람이 100살에도   있어?”

아이의 질문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 아이에게 아직  설명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럼~~! 100살에도   있지~ 엄마가 운동 열심히 하고 음식 골고루  먹고 유준이가 엄마 말  들으면 그때까지도   있지!”
진짜야? 정말이야?”

아이는 강한 의구심을 품은 채 되물었지만 나는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아이는 몇 방울의 눈물을 훔친 터였기 때문이다.


————————

나도 그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절대적인 두려움에 밤잠을 설친 날들이 숱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그런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인지는 알고 있다. 바로 어둠이다. 어릴 적 나는 그것을 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고요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고 어느 순간 어둠에서 환한 빛이 스며들자 웅성웅성한 세상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기억을 품은 어릴 적 나는 사람은 죽으면 다시 그 고요하고 캄캄한 어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밤에 잠자는 것은 그 어둠에 갇히는 것과 유사했다. 그래서 어릴 적 매일 밤마다 죽음에 두려워 울다 잠들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문득 어떤 밤에는 어둠의 공포가 몰려들 때가 있었다. 그러다 그런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아마도 아이를 낳고부터 였을 것이다. 내 육신으로 느낀 탄생의 경험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식해버릴 만큼 거대했다. 탄생 후 이어지는 육아의 과정 또한 나 자신의 본질이 바뀔 만큼 어마한 경험이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생의 무게감, 고단함이 밤의 어둠에 대한 공포 따위는 날려버려 줬다. 이젠 그 두렵던 밤의 어둠이 달콤한 휴식으로 느껴 쪘다. 그렇게 어둠의 공포가 사라지자 죽음의 두려움도 서서히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삶을 살아내기 바빠 두려움을 느낄 새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며 느끼는 아쉬움도 아이들의 자라며 성장하는 모습으로 보상받기도 한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인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안도감이 내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를 조금은 덜어준다. 다만,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 수 있을 때까지는 반드시 아이들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


아이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내가 100살이 되면? 엄만? 엄마가 1000살까지도   있어? 사람이 어떻게 그때까지 살아?”

나는 아직은 아이에게 그 두려움의 실체를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죽음의 상실보다는 생의 희열을 먼저, 더 많이 알려주고 싶다.

엄마가 그때 되면 잠깐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거야. 뭐가 되었든 엄마는 유준이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잠깐이지만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100살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아마 난 삶 앞에 상실한 전의를 다시 가다듬어 삶을 제대로 살아볼 용기를 되찾았던 것 같다. 100년 인생의 농도만큼 진하게 살아봐야지. 그래야지. 이 아이에게 알려줄, 가르쳐줄 것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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