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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Mar 31. 2020

위로에 대한 비판

위로에 대한 추억 그리고 현재

밥상 위에 갓 올려진, 폭신한 두부 몇 알이 빠져있는 된장찌개.

팍 쉰 총각김치 몇 개를 몰캉몰캉해질 정도로 푹 우려낸 물에 끓인 라면.

남은 떡국떡에 참기름, 간장, 고추장을 버무려 어묵과 같이 볶아낸 떡볶이.


나에게 위로란 저런 것이었다.

위로의 말은 서투나 위로의 방법을 잘 아셨던, 생업에 바쁜 내 어머니의 말없는 위로.

어머니의 위로는 '기다림'이었다.

다 커가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추슬러낼 힘이 필요하니 유난스레 달래기보단 힘들어도 그저 기다려 주는 것.


엎드려 우는 내 등을 쓰다듬던 손길.

우는 내 곁에서 같이 쏟아지던 눈물.

갈길을 잃은 채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분노의 말을 차분이 바라봐주던 눈빛

나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던 짝꿍의 말없는 위로.

짝꿍의 위로는 '곁'이었다.


위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딸의 걱정을 놓지 않는 어머니 라야 할 수 있는 것.

아침부터 저녁까지 옆에 붙어 지낸 짝꿍이라야 할 수 있는 것.

아픔을,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곁에 있는 이들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나를 위로하겠다는 이들을 참 많이도 만난다.

서점에서도 만나고, 강의장에서도, 세미나에서도, 유튜브, SNS에서도....

나랑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그렇게나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나를 위로해준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고맙다가도

책값으로 만 오천을 내야 하고 강의료 십만 원을 내야 하고 구독 버튼을 먼저 눌러야 한다니.

그들의 위로가 순간 공허해진다.


아무나 할 수 없던 위로를 아무나가 한다.

말 많은 위로에 휩쓸리다 보니 말없는 위로가 들리지 않는다.

그 덕에 아무나가 아닌 이들의 위로가 설 자리가 줄었다.

위로의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 이상하게 더 외로워져 가고 더 나약해져 간다.

한때는 서로에게 아무나가 아니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점점 더 아무나가 되어간다.


지극히 사적이고 은근했던 위로가 지금은 참으로 적극적이고 노골적이다.

위로받을 생각조차 없던 나를 '아, 내가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구나'하게 만든다.

그가 나에게 주던 위로는 세상 유일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똑같은 위로를 공급받는다.

위로가 기획, 생산, 유통되며 우리는 그걸 구매한다.


이쯤 되면 지금 받고 있는 수많은 위로의 메시지들에 의심을 가진다.

나는 진정으로 저 위로들이 필요했을까?

저 위로는 혹시 내 마음을 여는 것보다 내 지갑을 열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생각한다.

위로.

그것보다 먼저 스스로 강해질 생각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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