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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룬 Oct 29. 2022

먹고살기, 먹고 살기

지콜라의 답장

올해도 벌써 달력의 큰 글씨가 두 자리가 되었네요. 어휴, 어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워낙 쉽게 전전긍긍하고 걱정하는 프로 걱정러이다 보니 미래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제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인생은 40대부터라…. 한 가지 점점 더 확실해지는 생각은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나이가 한두 살 더 들어도 저 자체는 그대로죠.


그러니 우리처럼 쉽게 걱정하고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지금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고, 지금 내게 알맞은 선택을 하자.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하물며 미리 고민하더라도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때가 많고요.




저 또한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번역가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정말 이렇게 도전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올 한 해 본격적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아주 진부하고도 성실한 고민이죠.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는 일’의 문제 말이에요.


어디선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하는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녹록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지만, 저는 아직 이 일이 좋아요. 아니, 정말 좋아해서 문제이지요.


“자꾸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얼마 전 최재천 교수님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어요. 요즘은 이 말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막연하게 해보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일을 직접 공부하고, 또 실제로 해보고 나니 정말 더 이 일을 좋아하게 됐거든요. 


저는 한 회사에서 꽤 긴 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동안은 말하자면 음, 꼭 숙성되어 가는 치즈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점점 맛과 향은 그윽해졌죠. 그런데 어딘가 한 구석은 생쥐에게 파먹히는 기분이었어요. 좋은 걸 많이 얻으려면 그만큼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잘 팔리는 것을 만드는 게 전부라는 세계에서 제 뜻을 관철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옆길로 잠시 도망쳐 보기로 했어요. 번역은 저와 정말 잘 맞는 일이고 즐거운 일이었지요. 같은 길을 걷는 좋은 친구들도 만났고요. 하지만 사실은 밝은 비전도 희망찬 앞날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조금 더 즐겁고 덜 괴로울 뿐이죠. 일에서 자아 찾는 거 아니라고 하던데, 저는 지금 일에서 자아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평온과 작은 가난을 찾은 듯합니다. 먹고살 수 있을 만큼만 벌며 행복할지, 힘들더라도 맛있는 음식 마음껏 먹을 만큼 돈을 더 추구할지의 문제랄까요. 다시 말해, 궤도를 어떻게 수정할지 고민하는 셈이지요.


지금 우주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어서 ‘궤도’라는 말이 유독 친근하네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저자는 우주 비행사인데 비행사가 되려면 바늘구멍보다 좁은 관문을 뚫을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언제 찾아올지 모를 기회를 잡아채기 위한 끈기와 강인한 정신력이라고요. 마치 마라톤을 달리는 것처럼 처음부터 1등은 아니더라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우주 비행은 훨씬 더 스케일이 큰 일이긴 하지만, 몇 년이고 몰두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해냈다는 이야기가 마음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직업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학생 때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평생 끝나지 않는 고민이었어요. 제가 터득한 방법은 앞서 말했듯이 지금 내게 알맞은 선택을 하는 거예요. 다만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운 길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국 누가 우주선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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