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 앰브로즈 비어스
게임 기획자 7년 차까지는 괜찮았다.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면서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하고, 밸런싱을 맞추고, 프로젝트를 완성하며 실력이 쌓였다.
하지만 7년 차 이후부터 달라졌다.
더 이상 새로운 게 없었다. 프로젝트는 바뀌었지만 내가 하는 일은 똑같았다. 내가 아는 지식, 내가 경험한 유사 프로젝트의 반복. 성장이 아니라 반복이었다.
이직을 해봤다.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환경. 하지만 막상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본질은 같았다.
그래서 강의를 시작했다.
삶을 다르게 변화 주고 싶어서. 새벽 줌 모임도 시작했다. 뭔가 다른 문장을 써보려고.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이 참 어색하고 낯설었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10년 넘게 해온 일인데, 왜 이렇게 불편할까.
그날 깨달았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 어색함 속에서 우연히 비어스의 이 말을 만났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비어스의 대꾸: "이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사이를 어떤 문장으로 채울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순간 이해했다.
태어남(앞표지)과 죽음(뒤표지) 사이를 나는 다른 사람의 대본으로 채우고 있었다. 7년간 성장했지만, 그 이후로는 같은 문장을 계속 베껴 쓰고 있었다.
안 맞는 옷을 벗어야 했다. 내 이야기를 써야 했다.
그래서 퇴사했다.
게임의 메인 스토리를 기획할 때,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고, 최종 보스를 물리치고 끝난다. 하지만 그 사이의 챕터들, 선택지들, 대사 하나하나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결정한다.
똑같은 시작과 끝이어도, 어떤 게임은 감동적이고 어떤 게임은 지루하다. 차이는 그 사이를 어떤 이야기로 채웠느냐에 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7년간은 성장하는 챕터를 썼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같은 챕터를 계속 베껴 쓰고 있었다. 새로운 챕터를 쓰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안정된 스토리를 벗어나 불확실한 선택지를 누르는 용기.
비어스의 말을 곱씹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대본을 읽을 때:
"오늘도 어제와 똑같네"
"7년 전 내가 했던 일의 반복"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 빈 페이지만 쌓이고, 성장은 멈춘다
내 문장을 쓸 때:
"오늘은 이런 시도를 했구나"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어"
"불확실하지만 내 이야기야"
→ 페이지가 채워지고, 삶은 다시 시작된다
인생은 안정된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불확실한 문장을 쓰는 것이었다.
퇴사 후 나만의 '하루의 문장 루틴'을 만들었다.
매일 저녁: 오늘의 한 문장
- "오늘 내 인생에 쓴 문장은?" 기록하기
예: "새로운 강의를 준비했다"
챕터 제목
- "이번 주의 챕터 제목은?" 의미 부여하기
예: "프리랜서 기획자의 첫 달, 불확실 속의 자유"
다음 페이지
- "내일은 어떤 문장을 쓰고 싶은가?"
예: "면접을 보며 내 방향을 확인한다"
처음엔 불안했다.
안정을 버리고 불확실을 선택한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몇 달이 지나니 달라졌다.
기획 프리랜서로 일하고, 강의하고, 가끔 면접 제의가 오면 면접도 보고, 이렇게 글도 쓴다.
확실한 성과가 나는 건 아니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이건 내 이야기라는 것. 남의 대본이 아니라 내가 쓰는 문장이라는 것.
"안정을 버리고 불확실을 선택하는 게 두려워요."
비어스의 대꾸: "앞표지와 뒤표지 사이를 채우는 건 너야. 다른 사람의 대본 읽지 말고, 네 문장을 써."
퇴사 후 2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서제로 출근하는 길이 어색하지 않다. 아이 등교 후 여유로운 커피 한 잔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 업무와 저녁 8시 이후의 강의를 하는 삶이 회사 다닐 때보다 빡빡하지만 힘들진 않다.
안 맞는 옷을 벗었으니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문장을 쓸까. 강의를 준비할까,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할까, 글을 쓸까. 하루하루가 나의 선택이고, 나의 문장이 된다.
비어스의 말처럼, 앞표지와 뒤표지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나다. 안정된 반복이 아니라 불확실한 도전으로. 남의 대본이 아니라 내 문장으로. 매일매일, 내 인생의 저자가 되어 한 줄씩 써 내려간다.
인생은 안정된 대본이 아니라 불확실한 문장이다. 오늘 쓴 한 문장이 모여 내 인생이라는 책이 된다.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썼나요?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면, 어떤 용기가 필요한지 댓글로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