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세계, 그리고 남겨진 것들

by 루니

"안녕히 가세요, 모험가님들. 그동안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습니다."


내가 처음 시스템을 설계했던 대전 액션 RPG 게임의 서비스 종료 공지였습니다.

그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몇 년을 쏟아부어 만든 경제 시스템, 아이템 구조, 길드 규칙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까요?


1. 끝이 아니라, 흔적

게임을 만든다는 건, 하나의 우주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물리 법칙(게임 룰)을 정하고, 경제 구조(재화 시스템)를 만들고, 사회 체계(길드, PvP)를 구축합니다. 플레이어는 우리가 설계한 이 소우주 속에서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이별합니다. 그리고 나면 남는 건, 시스템과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수많은 '불완전한 우주'를 만들어왔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엉망이 된 경제 시스템

유저들이 단순한 채팅방으로만 사용했던 야심 찬 길드 시스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전투 시스템

완벽하지 않았던 룰, 의도치 않게 생긴 버그,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밸런스. 하지만 그 속에서 유저가 느낀 순간의 감정들, 동료들과 밤새 고민했던 시간들이 기획자로서의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했습니다.


2. 우리가 만든 세계는 사라져도, 경험은 남는다

현실을 직시합시다.

많은 프로젝트는 완성되지 못하고 사라지며, 출시된 게임조차 언젠가는 서비스 종료와 함께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세계는 사라져도,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사라지지 않는 것들

협업하며 쌓은 신뢰

실패에서 얻은 직관과 용기

작은 성취에서 오는 희열

플레이어의 따뜻한 피드백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든 특정 게임을 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3. 남겨진 것들 – 사람과 데이터

게임이 종료되면 서버는 닫히고, 로그 데이터는 아카이빙 되며, 유저들은 다른 게임으로 떠납니다. 하지만 사람 안에 남은 경험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유저의 마지막 메시지: "이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해요. 복잡한 길드 시스템 덕분에 진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네요."

함께 일했던 개발자의 고백: "그때 당신이 우겨서 만든 그 이상한 시스템… 지금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걸 제안할 때 자신감이 생겨요.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배웠거든요."

결국 남는 건 사람과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스템 기획자가 세상에 남기는 진정한 자산입니다.


4. 이제는 다른 세계를 설계한다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더 이상 거대한 게임의 한 축만 설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게임에서 배운 시스템 사고의 원리와 철학은 이제 내 커리어와 일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교육 콘텐츠: 후배들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설계합니다.

개인 브랜딩: 내 경험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플랫폼을 구축합니다.

일상의 루틴: 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와 건강한 생활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인간관계: 네트워킹도 상호 이익을 만드는 구조로 접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삶의 설계 원리가 되었습니다.


5.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것

기획자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는 단순히 '기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설계한 규칙 하나가 수십만 명의 경험을 좌우합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억될 추억이 됩니다. 그 책임감과 자부심을 잊지 마세요.

실패는 다음 세계의 밑거름이다.

19년 동안 성공한 프로젝트보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실패가 다음 기획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마세요.

사람을 잊지 마라.

화려한 시스템, 혁신적인 메커니즘, 완벽한 밸런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결국 사람입니다. 플레이어의 즐거움, 동료의 성장, 그리고 나 자신의 발전. 기술과 시스템은 그저 수단일 뿐입니다.


마지막 서버 공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그동안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습니다."


아닙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습니다.

그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그때 배운 경험은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쌓은 철학은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세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이어질 뿐입니다.

첫 기획서를 쓰던 그날처럼, 저는 오늘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게임 속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더 나은 삶을 만드는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만든 이 모든 것들도 다른 형태로 변화하며 누군가의 삶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는 계속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자입니다.


keyword
이전 20화시스템 기획자의 커리어 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