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뭔가 씁쓸한 뒷맛.
최근 들어 관심이 가는 브랜드가 있는데, 무인양품이다. 사실 매장에서 제품을 구입해본 기억은 많지 않지만, 과하지 않고 본질에만 집중한 제품들과 인테리어를 보면 매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는 무인양품 현 사장 마쓰이 타타이쓰가 직접 쓴 책이다. 저 "구조"라는 말이 어떤 의미 일까 궁금해서 읽어 본 것이었는데, 결국 우리가 소위 말하는 회사 내 시스템 혹은 매뉴얼에 관한 내용이었다. 약간의 허무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구조"의 토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게 무려 17년 전이고, 무인양품의 매장 직원들을 위한 매뉴얼이 그 "구조"의 시발점이었다는 점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유독 자주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직원이 바뀌더라도 어떠한 빈자리도 느껴지지 않도록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구절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니, 내가 다녔던 회사가 생각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그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에서도 업계 최대 수준이었고, 지금은 몸집을 줄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아직도 북미에서는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는 브랜드들을 가진 회사였다. 한 때는 북미뿐 아니라 세계 1위 자리도 앉았었던 이 의류회사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자라와 H&M에 선두자리를 내준 지 오래이고 유니클로에도 잡힐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분위기는 이미 유니클로가 제쳐버린 느낌이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북미대륙의 엄청난 구매력으로 세계 3위는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였다. 유니클로 회장 야나이 다다시씨의 책 <유니클로 이야기>에도 유니클로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가 이 회사의 매출이 아닌 글로벌 매니지먼트 시스템이라고 기술되어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자라나 H&M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여타 회사들에 비해 이 회사의 "구조"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헌데, 이 "구조"가 너무 확실하면 개인의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편협한 사고 일까.
나는 첫 사회생활을 직원 20명 정도의 작은 회사에서 시작했다. 그 회사는 설립된지도 얼마 안 되었고, 구조를 만드는 것보단 당장 이번 달 매출을 올리는 데 훨씬 더 많은 열을 올리시는 사장님의 스타일 상 업무체계라는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본 업무를 하다가, 샘플 픽업을 위해 2시간 운전해서 바이어 사무실에 갔다 오기도 하고, 소량 물건 선적을 위해 UPS distribution 센터에 직접 가기도 하고, L/C오픈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가, 제품 선적서류를 작성하기도 했다. 땡볕이 내리는 여름날 하역작업, 이른바 까대기 업무 또한 내 부 업무 중 하나였다.
당연히 퇴근이 늦는 날과 육체적으로 힘든 날도 많았지만, 재미있었다. 비록 말단 사원이지만 회사에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나는 그것을 문제없이 수행해내고 있구나라는 자부심까지 들었다. 말단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돌고 돌아, 마지막이 될 이 회사에 입사했는데, 이 회사는 첫 회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일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위 열거한 업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나는 오로지 내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됐다. 처음에는 기뻤다. 글로벌 의류회사에 들어와, 너무나도 좋은 빌딩 안에,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 업무만 하면 위에 열거한 나머지 업무들엔 모두 다 담당자가 따로 있는 이렇게 체계가 잘 잡힌 회사에서 일하다니.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스스로에게 질문이 생겼다. 만약 지금 당장 이 회사를 나온다면 나는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그땐 이미 내 본 업무를 제외하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마치 눈가리개를 착용한 힘없고 지친 경주마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기업의 회장 입장에서는 90%가 구조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고, 아직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을 목표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조직의 효율이 좋아지고 Loss의 발생이 적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혹은 지극히 내 입장에서는, 그 나머지 10%만이 우리의 몫인 건가라는 씁쓸한 뒷맛이 느껴진다.
내가 퇴사하고 약 1년 후에, 내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문을 닫았다. 한국지사에서 행해졌던 모든 기능들은 어떤 동남아 국가로 고스란히 이전되었다. 역시 효율성 있는"구조"에 의한 결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