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간의 생산성을 극대화했던 나라, 바로 영국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이 두 가지 혁명을 통해 ‘모든 사람이 윤택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노동자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노동 시간 단축 제도, 노동 조합 제도는 노동자들이 산업혁명의 주체로 행복하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갔다. 노동 현장에서 부상당해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적은 월급으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고아들……. 영국인들은 의문에 휩싸였다.
왜 나라가 빈곤해지는가?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당시 영국인들은 가난이란 개인이 게으르고 절제를 안 하며 성실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엄청난 빈곤 앞에 사람들은 가난의 이유를 개인에서 찾지 않고 사회구조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1899년 영국은 세계 최초로 빈곤의 원인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빈곤의 원인이 무절제한 개인 탓도 있었지만 그 비율은 매우 낮게 나타났다. 가장 큰 이유는 일을 해도 월급이 쥐꼬리만 하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가정마다 많은 자녀를 낳았는데 적은 월급으로는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었다. 이 조사 결과는 영국인들에게 빈곤이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이유로 발생할 수 있음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영국은 곧 최저 임금 제도를 실시해 전체 노동자들의 월급을 올리는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계속 “빈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했다. 먼저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는 빈곤의 원인이 급격한
인구 증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혁명에 의해 생산량이 1, 2, 3, 4, 5, ……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더라도 인구가 1, 2, 4, 8, 16, ……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혁명에 의한 인간의 생존 수단 발전으로 인해 산업 혁명 이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급격히 증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맬서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은 인구의 증가가 노동력의 증가로 이어져 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맬서스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급격한 인구 증가는 수용 가능량당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권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의 인구 억제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영국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가 인구론의 논리를 기초로 하여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던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200여 년이 지나도 계속 살아남아 인권 개념이 빈약한 중국과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중국과 우리나라 정부는 영국 정부와 같은 이유로 인권을 무시하는 강력한 산아 제한정책을 실시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 이론은 과연 맞는 논리인가? 그의 이론대로 지구 전체 인구 증가에 의한 수요 증가가 공급 증가를 훨씬 앞질러 모두가 빈곤해지는 세상이 도래 했던가? 그러지 않았다. X프라이즈재단의 회장 피터 디아맨디스가 말한 대로 인류의 생산 기술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맬서스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다시 ‘빈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로 돌아가자. 맬서스의 인구론 이후,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생산력이 증가함에도 빈곤이 계속되는 이유를 단순히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력의 이익이 소수의 땅 소득자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인구 증가는 빈곤의 직접적 이유가 아니었다. 인구가 증가할수록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다. 이것은 땅의 수요를 증가시키고 결국 농토 가격이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농토의 지대가 올라가면 덩달아 집, 공장, 사무실을 짓기 위한 땅값도 올라간다. 결국 생산성 향상은 최종적으로 땅값의 상승을 부추기며 생산성 향상에 의한 늘어난 소득은 노동자, 기업가도 아닌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의 몫이 된다. 이것이 리카도가 생각한 빈곤의 직접적 논리였다.
리카도는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의한 땅값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자유무역을 통한 식량 수입화를 주장했다. 그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농업 국가로부터 곡물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식량 수입을 통해서 땅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 땅값이 떨어질 것이고 결국 이익은 노동자와 기업가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논리는 향후 경제학자 헨리 조지에까지 이어졌다. 헨리 조지는 더 나아가 불로소득을 모두 국가가 환수하고 노력한 대가로 버는 근로 소득에 세금을 매기지 말자는 정책을 내놓았고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한편, 칼 마르크스는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깨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는 자본주의경제 체제 속에서는 구조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격차가 계속 커지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부의 불균등이 빈곤 이유라고 생각했다. 자본 투입, 상품 생산, 상품 판매를 통해 생긴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초과 노동의 결과에 따른 것이고 노동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본가들은 그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몫을 줄이고 자신의 이윤을 올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이윤을 생산에 재투입시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이 산업이 아무리 고도화되고 생산력이 극대화되어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사회 생계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이유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 헨리 조지와 달리 점점 더 부자가 되는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자본가들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가들은 비록 불로소득자들은 아니지만 자본가들이 노동한 몫과 함께 노동자들이 기여한 엄청난 몫을 챙김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속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자본가 계급의 권력과 지배만 강해지게 하고 노동자 계급은 더욱 더 불리해진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빈곤의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로 지목했다. 그러고는 혁명 즉, 노동자 계급이 하나의 정치적 계급으로 뭉치고 저항하는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통해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 수단을 사회 공유재로 만드는 사회주의제도를 세울 수 있고 이것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급속도로 전 유럽에 퍼졌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10월 혁명’에 성공해 사회 주의 제도를 세웠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수많은 나라가 도미도처럼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켰다. 마르크스가 죽고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지구 땅덩이의 6분의 1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장이었다.’ 이 말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결국 사회주의를 표방한 거의 모든 공산국가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경제 체제로 편입되었다. 지금 북한과 쿠바 사람들은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빈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단순한 질문은 수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에 대한 대답은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빈곤의 문제는 엄청나며 우리나라의 수많은 청년, 노동자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 “빈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계속 외치면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아이작의 신간이 나왔습니다! (23년 10월 31일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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