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이후 나는 미국 미시간대학교 연구실에서 일하다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삼성에서 반도체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처음 삼성에서 일을 시작할 때 나는 한 가지가 궁금했다. 그것은 10년 가까이 학계에서 내가 갈고닦았던 한 가지 생각의 기술 즉, ‘연역적 가설 탐구’가 현업에서도 통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나는 반도체 회사 내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메일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삼성이 반도체 글로벌 선두 기업 중 하나이며 반도체업이란 최신 과학과 공학 지식의 종합 예술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나는 가설과 검증이란 용어를 자주 볼 줄 알았다. 그런데 ‘가설’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회의 때에도 가설이란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순간 ‘아니 과학/공학 기술 회사인데 과학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제품을 제대로 개발하고 양산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 생각했다. 표현만 다르지 분명 ‘가설과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이 업무 문화에 녹아져 있을 거라 나는 추측했다. 가설과 검증의 존재를 찾아낸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하다 보니 계속해서 반복되는 한 가지 단어가 있었다. 바로 ‘모델링’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모델링이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 불량 현상에 대한 모델링이 뭔가요?”
“다음 회의 때는 관련 부서들과 미리 조율해서 모델링과 대책 수립 부탁드립니다.”
“처음 경험하는 신제품 불량으로 아직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나마 현재 확인된 현상을 근거로 세 가지 모델링하였고 각각 모델링 검증하여 발표하겠습니다.”
“모델링 재현성 검증 결과 나왔나요?”
“모델링 검증이 되었으니 지난주 Quick Fix 개선 조치는 계속 Working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모델링이란 낯선 단어가 반복적으로 들렸지만, 뭔가 낯이 익었다. 나는 모델링의 단어를 가설로 바꿔보았고 그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삼성에선 ‘가설’을 ‘모델링’이라고 부르고 ‘가설을 세운다.’를 ‘모델링을 세운다.’ 또는 ‘모델링한다.’라고 부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왜 모델링이라 부르는 걸까 궁금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그냥 계속 그렇게 사용해 왔다.”는 답만을 얻었고 정확한 출처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확인 가능한 모델링에 대한 61가지 정의를 모두 확인해 보았다.
모델링은 곧, 가설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에서 석고상, 모형을 만드는 것을 모델링한다고 부른다. 그 파생의 형태로 3차원 물체를 컴퓨터로 그려낼 때도 모델링한다고 한다. 또한 음향에서 수학적 공식을 활용하여 실제 음을 컴퓨터로 구현해 낼 때 모델링한다고 하며, 시뮬레이션 쪽에선 시뮬레이션하는 실제 대상의 특징을 최대한 가깝게 나타낼 수 있도록 각종 요소와 물리적, 수학적, 논리적 표현을 구현하는 것을 모델링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델링한다.’는 것은 실제와 닮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모델링에 대한 정의를 읽다 보니 모델링이 충분히 과학, 공학에서 사용되는 가설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껴졌다. 가설 즉, 연역적 가설이란 연역적 형식을 가지는 참에 가까운 증명해야 할 명제이다. 마찬가지로 모델링이란 실제와 최대한 가까운 물리적/가상적 모형 또는 그 모형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가설은 모델링이고 모델링은 가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더 나아가 다른 곳에서는 가설 또는 모델링을 어떻게 부르는지 난또 궁금해졌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컴퓨터 공학에서는 모델링을 ‘시뮬레이션’과 혼용해서 사용한다. 경제/경영 분야에서는 ‘시나리오’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어떤 원인적인 조건 또는 상황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 또는 나타났다는 개연성 높은 가설을 시나리오라고 부르고 있다. 설계/디자인 분야에서는 ‘디자인’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어떤 요소 또는 조건이 반영되어 있어 원하는 효과 또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실험하고 검증하듯이,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시나리오와 디자인 모두 평가되고 검증된다. 종합해 보면, 가설이란 말은 분야에 따라 모델링, 시뮬레이션, 시나리오, 디자인이란 다양한 단어로 쓰이고 있다.
나는 구라 치지 않는 우주 속에서 가설 곧, 우리의 생각을 제대로 세우고 검증하여 생각대로 되게 만드는 일체의 방법들을 말하려 한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가설이란 말을 책 전체에 걸쳐 어떻게 표기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내 생각에, 가설은 너무 과학적이라 대중적이지 않을 것 같았고, 디자인은 너무 예술적이라 마찬가지로 대중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시뮬레이션은 너무 가상적이며 매우 특수한 분야의 언어처럼 느껴졌고, 시나리오는 너무 문학적으로 다가왔다. 내게 가장 대중적으로 느껴졌고 중립적으로 느껴진 단어는 모델링이었다. 또한 오랜 기간 직장에서 일하면서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모델링이란 말을 듣다 보니 모델링이란 단어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가설이란 의미의 단어들을 모델링으로 대표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모델링을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말이 길었다. 다시 이 장의 본론으로 돌아가자. 내가 과학자로서 갈고 닦았던 생각의 기술인 연역적 가설 탐구는 현업에서 모델링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통하고 있었다. 학계에서 연역적 가설을 던지고 이를 잘 증명하는 자가 실력이 있는 사람이듯, 직장에선 모델링을 잘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검증하여 유용한 지식과 문제 해결력을 얻는 자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리더인 두 사람 에이스와 베스트가 있다. 두 사람은 평소 이렇게 말을 한다. 먼저, 에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제품에 불량이 발생해서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바로 유관 부서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우리 조직력 점수가 휴우... 결국 작년과 똑같이 하위권이네요. 도대체 뭘 해야 될까요?”
“금년도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경영 목표 수준의 20% 상향된 도전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각 업무 담당자별로 목표 상향 조정 부탁드립니다.”반면, 베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불량률 3% 수준의 이슈가 어제 자부터 발생 중입니다. 비트라인이 비정상적으로 연결되는 전기적 속성으로 비트라인 모듈과 메탈라인 모듈의 변경점 우선 파악했고 소재 변경점과 신규 설비 확산 변경점 추정 혐의로 해당 유관 부서 긴급 원인 점검 중이며, 불량 상세 분석 결과 곧 나오는 대로 매칭해 보겠습니다.”
“우리 조직력 점수가 아쉽지만 작년과 똑같이 하위권이네요. 나름 금년도에는 작년에 해보지 않은 행사도 기획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네요. 결국 업무의 질적인 측면에서 부서원들이 만족할 만한 대책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금년도에도 경영 목표의 20% 상향 수준으로 도전 목표 달성해야 합니다. 작년 가장 어려웠던 측면이 바로 원가 경쟁력이었어요. 각 부분별로 목표 상향하고 전략을 수립하되, 특별히 원가 경쟁력 부분은 작년도에 잘 안된 이유 파악하고 그 대책을 포함시킵시다.”
누가 더 일을 잘하는 것 같은가? 누가 봐도 베스트이며 그 이유는 모델링 역량의 차이이다. 에이스는 확인된 현상에만 머물러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베스트는 그 현상을 넘어 ‘무엇을 할 때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란 모델링을 포함하여 업무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견고한 모델링을 세우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모델링을 잘하는 사람들은겉보기에 마치 자기가 생각한 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역량은 좀 더 연역적으로 보이는 모델링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저연차와 고연차의 가장 큰 역량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모델링이다. 저연차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델링은 적중률이 낮은 편이다. 반면 산전수전 겪어본 고연차는 더 확률 높은 모델링을 가지고 일을 원하는 방향으로 되게 만든다.
아이작 유
<과학자의 사고법> 중에서
읽으시면서 떠오른 생각이나 다른 관점이 있다면, 댓글로 살짝 나눠주세요.
누군가의 한마디에서 또 다른 생각이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이 브런치 공간이 생각이 오가고, 서로의 시선이 스치는 장이 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