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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한 최초의 일

관찰 행위의 본질

by 아이작 유

앞서 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 기존 이론/지식/논문/문헌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선행될 때, 연역적인 모델링, 진짜에 가까운 생각을 해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사실 나는 전에 출간했던 책들을 통해서 관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떻게 깊이 있게 관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등등의 말들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하다고 말해왔던 관찰의 핵심 본질에 대해 정말 목이 말랐다. 그 답을 찾고자 나는 오랜 기간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헌들을 찾아다녔고 나의 목마름을 한 방에 해소시킨 글을 발견했다. 그건 《구약성경》의 모세오경 중 하나인 창세기였다. 창세기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첫 번째 인간 아담이 가장 처음으로 한 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최초의 인간의 최초의 일은 바로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자신이 생물을 창조한 다음, 인간에게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신은 그저 아담에게 생물들을 데려갔고, 아담은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서 나는 다음 질문들이 떠올랐다. 아담은 어떻게 생물들의 이름을 지었을까?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이다. 내 상상에 갑자기 생물들을 보자마자 아담의 머릿속에 막 이름들이 떠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담이 우리와 같았다면, 아마도 그는 한 생물의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그 생물에 대해서 제대로 관찰했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이 녀석은 철갑을 두른 것 같은 상어니까 ‘철갑상어?’ 어라, 이 녀석은 그저께 이름 붙인 독수리처럼 생겼는데 머리가 대머리니까 ‘대머리독수리?’ 뭐 이러지 않았을까 싶다.




관찰한다는 것의 본질


이런 생각을 하니 어쩌면 인류 최초의 일은 ‘생물들 이름 짓기’가 아니라 ‘생물들 관찰하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정의하는 작업이기에 결국 ‘관찰’한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매일의 일상 속에서 던지는 질문들 “그게 뭐지?” “이게 뭐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지?”와 같은 질문들 속에 관찰은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앞으로 관찰을 어떻게 할지 그리고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가 너무나도 명확해졌다. 바로 아담처럼 이름 짓기를 하는 것! 끊임없이 무엇이 무엇이냐고 묻고 그 무엇을 말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관찰을 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작가로 거의 매년 한 권의 책을 꾸준히 출간했다. 그런데 2023년 크게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글쓰기가 더 이상 재밌지 않고 창의력과 영감의 수준은 바닥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위한 어떠한 모델링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나 자신에게 하나하나 물었던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무엇?’질문들을 물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그것을 쓸 때 드는 느낌은 뭔가?”

“예전과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지금도 꾸준히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인가?”

“글쓰기란 내게 무엇인가?”

“책쓰기란 내게 무엇인가?”

“글쓰기는 내게 어떤 즐거움을 주는가?”

“작가 활동을 한다는 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무엇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는가?”

“돈을 벌지 못한 대로 글을 쓰고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정말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처음 작가를 준비했을 때 글쓰기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책쓰기라는 결과에 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내가 글쓰기가 주는 행복감에 만족해하지 않고 베스트셀러, 유명 작가가 되어 인정받고 돈 많이 버는 것을 좇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찰을 배경으로 나는 생각했다.


‘다시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로만 만족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 써야만 하는 글쓰기가 아닌 정말 말하고 싶은 글쓰기를 회복한다면, 슬럼프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은 뒤따라올 거야.’


나는 이 모델링을 믿고 원래 가지고 있던 출간 계획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아무런 계획 없이 내가 원하는 글을 자유롭게 쓰고 내가 원하는 책을 두서없이 읽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처음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 나는 일상 속에서 재미난 것을 발견하면 난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묘사하는 습작 글들을 써보곤 했다. 나는 다시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과 내 일상 속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에 대해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들의 방향이 어디

로 나를 이끄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두 손에 완전히 맡겼다. 내 두 손은 분명 내가 원하는 글을 내게 보여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타이핑을 두드릴 때 경쾌하고 행복한 리듬감이 되살아났다. 이건 느낌적인 느낌인데, 마치 재즈 피아니스트가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두 손의 모든 손가락들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고 내 손가락들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경쾌한 리듬감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난 다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슬럼프를 극복했다.


“무엇이 무엇인가?”의 질문은 정말 너무나도 간단하고 쉬운 질문이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이 쉬운 질문을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때로는 모르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귀찮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묻지 않는다. 나는 내 두눈으로 직접 포착해 낸 바로 이 현상이,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보다는 익숙한 생각에 있길 좋아하고 그로 인해 더 좋은, 더 나은, 더 확장된, 더 창의적인 생각을 끌어당기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곧, 무언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생각의 재료를 모아가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철학들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정의된 개념과 개념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졌다. 만약 당신이 더 많은 생각들을 하고 싶다면, 당신은 더 많이 “이게 뭔가?” “저게 뭔가?”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들을 모아야 한다. 나는 당신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 또한 호기심이 없더라도 일부러라도 이 질문을 던지길 호소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은 당신이 위대한 생각의 집을 짓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료가 될 것이다. 반대로 만약 당신이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늘 같은 것을 같은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늘 같은 생각들의 반복 패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이작 유

<과학자의 사고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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