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아이 - 03
“산모님, 정신 차리세요!”
목소리는 분명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지만, 마리는 그 소리를 바닥에 고인물처럼 멀리서 느꼈다. 물속에 얼굴을 담근 사람처럼,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빛도, 온기마저도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느낄 수 없었다. 눈꺼풀 아래에서 검은 물결이 일렁이고, 바닥이 이마를 향해 기울었다.
‘아기가…’
그 마지막 생각만 남긴 채, 그녀는 가볍게 쓰러졌다. 마치 종이로 접은 사람처럼.
병원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요했다. 몸을 가만히 누인 채, 하얀 천장과 깜빡이는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 빠져나갔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마리야… 내가 왔어.”
그는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마리는 그 손이 낯설다고 느꼈다. 이 손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 이미 늦어버렸기 때문이겠지. 담당 의사는 병실로 들어와 차분하게 말했다.
“유산입니다.”
이후 한동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누워만 있었다. 시간은 창밖으로 조용히 흘렀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항상 같은 꿈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을 떠 보면, 고요뿐이었다. 냉장고에선 음식이 상했고, 세탁기 안에는 젖은 빨래가 며칠째 들어 있었다. TV는 꺼져 있었고,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세상이 움직이긴 하는 걸까, 아니면 멈춘 채 그녀만 여기 있는 걸까. 남편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하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도 힘들어.”
“이건 우리 둘 다에게 좋지 않아.”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말했다.
“너랑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그리고 며칠 후, 그는 목적지에 대한 말도 없이 떠났다. 그가 떠난 방 안엔 그의 체취가 오래 남아 있었다. 마리는 베개를 꼭 껴안고 눕기만 했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불 꺼진 사람처럼.
그 후로 마리는 다시 병원에 복직했다. 의사가 “조금이라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을 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통계적 조언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움직이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출근 첫날, 출입증을 목에 걸며 병동으로 들어서던 순간,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잊자. 몸을 움직이자. 괜찮은 척하자. 그러나 그 결심은 병동 복도에 가득 찬 울음소리 앞에서 금세 깨졌다. 산모들의 웃음소리, 아기의 첫 울음, 분만실 문 앞에서 울먹이던 남편들의 얼굴들. 그 모든 게 마치 멍든 상처를 계속해서 누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예전에는 따뜻했던 공간이었다. 지금은 냉장고 속 유리병처럼 차가웠다.
밤근무 중이었다. 응급 산모가 들이닥쳤고, 당직 의사는 회의 중이라는 말만 남긴 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리는 메뉴얼대로 움직였다. 긴장된 손끝, 메마른 입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했다. 하지만 그 산모는 새벽 2시 47분, 끝내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사무실로 불려갔다. 책상 위엔 서류가 놓여 있었고, 팀장은 회피하듯 눈을 피하며 말했다.
“우리도 곤란해, 이마리 씨. 언론이 벌써 알아버렸고… 병원 이미지를 생각해야 하니까…”
그 말 뒤에 나오는 설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책임지라...”는 말만 또렷했다.
며칠 후, 뉴스에는 ‘익명의 간호사 과실’이라는 짧은 기사가 올라왔다.
“간호사 A씨의 응급 대응 미숙으로 산모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은 내부 조사를 진행 중이며, 해당 간호사는 현재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다.”
마리는 커튼을 닫은 방 안에서 그 기사를 수없이 읽었다. 그 안에 등장하는 ‘익명’이 자신이라는 걸, 온 세상은 몰랐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팩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맥락은 누락돼 있었고, 진실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의 ‘책임’이 필요했을 뿐. 그리고 그게 마리가 된 것이다.
마리는 집안의 모든 커튼을 닫았다. 처음엔 햇빛이 눈부셔서였고, 나중엔 밖을 보기 싫어서였고, 결국엔 바깥 세상이 무서워서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고, 밥솥 안의 밥은 까맣게 굳어가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커피를 타는 게 유일한 움직임이 되었다. 컵 안의 커피는 반쯤 마신 채 식어 있었고, 며칠째 치우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물방울 자국이 생기고, 가끔 벌레가 날아들었다. TV는 꺼져 있었고, 시계는 여전히 오후 3시에서 멈췄고, 카페트 위에는 그녀가 며칠 전 벗어놓은 셔츠가 구겨져 있었다. 마리는 그것들을 치우지 않았다.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집 안 어딘가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들은 것 같았지만, 멈춰서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녀는 그 소리가 환청인지, 기억인지, 혹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자아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벽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눈을 감고, 가끔은 잠들지도 못한 채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걸 느꼈다. 하지만 창밖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곳엔 언제나 회색빛 구름만 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저녁, 거실 테이블 위 방치된 휴대폰 화면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그녀는 무심코 알림을 열었다. 한 통의 메시지. 발신자는 마리의 결혼식에도 와준 대학 친구인 은지였다.
“마리야,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혹시 너희… 요즘 사이 괜찮아?”
마리는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몇 초간 답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자 메시지는 바로 이어졌다.
“나 오늘 길에서 우연히 너희 남편 봤어.
근데 옆에 어떤 여자가 있었어. 그냥 친한 사이 같진 않더라.
혹시 오해면 미안… 하지만 너한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마리는 휴대폰 화면을 닫았다. 화가 나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듯한 감각. 온몸이 조용히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눈동자, 창백한 얼굴. 그동안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 듯한 자신이 보였다. 그 안에 사랑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그늘진 채 서 있는 자신.
‘나는 여기를 떠나야 해. 반드시……’
그 생각은 불현듯 그녀의 마음에 들어왔다. 떠나야 한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행 가방을 꺼내는 손은 떨렸지만, 그 떨림 속에선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고통, 이 배신, 이 공허에서 멀어져야 했다.
길거리에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어둠이 깔린 도시를 한 걸음씩 걸어가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오래 떠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더 이상 숨 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작 유
<경계의 아이> 소설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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