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퇴사한 첫날 아침, 나는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알람 없이 눈을 뜨고, 지하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되는 자유.
‘이제야 나다운 삶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낯선 공허가 찾아왔다.
휴대폰은 고요했고, 메일함은 비어 있었다.
기자 시절 하루에도 수십 번 울리던 전화벨이, 이젠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하루.
그 고요가 이렇게 무거운 줄은 몰랐다.
직책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기자였다. 명함에는 회사 로고와 직책이 있었다.
“○○뉴스 기자입니다.”
그 한마디로 인터뷰가 시작됐고, 사람들은 내게 일정한 무게를 부여했다.
퇴사 후, 그 직책이 사라지자 나는 그냥 ‘정 시현’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직함 없이도 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사람일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내 이름보다 직함으로 먼저 기억되던 내가, 알맹이만 남으니 생각보다 작고 불안정했다.
호명되지 않는 하루
퇴사 직후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
회의 일정도, 취재 요청도, 원고 마감도 없다.
처음에는 해방감이었지만, 곧 존재감의 부재로 다가왔다.
마치 사회라는 네트워크에서 분리된 듯한 고립감이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호명되는 순간 존재를 확인하는 사회 속에 살아왔다.
회사에서 상사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독자가 내 기사를 찾을 때, 누군가 메일함에 ‘기자님’이라 쓰며 메시지를 남길 때 — 그때 나는 사회 안에서 기능했고, 존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퇴사 후 그 모든 호출이 멈추자, 나는 더 이상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그 침묵이 낯설고 두려웠다.
남은 연락, 드러난 진짜 관계
흥미로운 건, 연락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다.
기자 시절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오던 전화와 메일은 확 줄어들었지만, 그 틈에서 드러난 게 있었다.
홍보 에이전시, 출입처 관계자들의 업무적 연락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간간히 오직 ‘나’라는 사람 자체를 보고 연락을 해오는 이들이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밥 한번 먹자.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더 이상 기사를 부탁할 일도, 자료를 보낼 일도 없는 사이에도, 나를 찾아와 밥을 사주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직함이 사라진 뒤에도 이어지는 관계야말로 진짜 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그 관계들이야말로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다시, 나를 묻다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나라는 사람은 회사명, 직책 없이도 온전히 설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나 개인의 혼란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누구도 영원히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다.
직업은 끊임없이 바뀌고, 플랫폼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으며,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금세 ‘호명되지 않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건 자기 목소리다.
누군가 정해준 호출 속에 살던 시절에서, 내가 정한 길을 걸어가는 시절로 바뀌었으니까.
불안은 여전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
회사명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공허와 가능성 사이
퇴사 후 찾아온 공허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허가 두렵지만은 않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하루,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찾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고요가 새로운 시작의 증거가 될 거라 믿는다.
호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사람.
스스로 자리를 만들고, 자기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사람.
혹시 당신도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있나?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이 고요 속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