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힘들게 자취하냐면

우리 가족에게 독립이란 당위니까

by 나경

동물은 어떻게 독립하는가

TV 프로그램 <동물농장>에서 한 에피소드를 봤다. 아파트 베란다에 둥지를 튼 어미새가 아기새들을 키우는 내용이었다. 어미새는 아기새들을 지극정성으로 밤이고 낮이고 보살폈다. 배고프다고 짹짹대면 지렁이를 물려다 주고 핥아주고 안아주며 그들을 양육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커갔고 어느덧 비행과 독립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어미는 어렴풋이 느꼈다. 아이들을 독립시켜야겠다는 큰 다짐을 한 어미는 지렁이를 잔뜩 물고 왔다. 아이들은 짹짹대며 '배고파요 밥 주세요'를 연신 외쳐댔다. 아이들은 나흘을 굶은 이후여서 그 아우성은 평소의 데시벨을 상회했다.


그때였다. 어미는 갖은 지렁이 몇십 마리를 게걸스럽게 아이들 앞에서 먹어치웠다. 방송에서는 황당하고 구슬픈 효과음과 함께 아기새들의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어미는 홀연히 떠났다. 깃털하나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할 것임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 마리씩, 난간에 오르는 연습하다가 이내 하늘로, 숲으로 날아갔다. 마지막 아기새까지 저 먼 나무숲으로 비상을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는 저 건너편 아파트 꼭대기에서 아이들의 비상을 몰래 지켜보고있던 어미새를 비췄다. 아이들을 마지막까지 눈에 몰래 담아내고는 그제야 당신의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어미는 비행을 알려준 적이 없다. 그저 따듯한 둥지 속에서 잘 먹고 쉬게 해 주었고 행동으로서 아이들을 계도하고 인도했다. 그들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끝까지 믿었을 뿐이다.



인간의 독립 방법

누군가 내게 학교랑 본가가 멀지 않은데 왜 굳이 독립을 해서 사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유라 할 만한 말이 없었다. 부모님과 나에게 모두 독립이란 당위의 문제였지, 합리성에 기초한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어차피 독립은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님은 늘 손뼉 치고 독려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라며 장려했다. 분명 부모님의 둥지가 주는 안온함이라던가 풍요로움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과거는 과거일 뿐, 내가 당면한 현실은 정글이고 직접 헤쳐나가야 한다. 꼭 부모님 만큼이나 풍요를 누려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당장의 생존을 해내지 않는다면 그 상상은 상상에 머물 뿐이다. 현실은 안온함을 상상하면 마법처럼 뿅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무엇보다 성인이 된 이상 부모님이 나를 위해 돈을 쓴다면 그건 그들의 선택이지, 당연한 도리가 아니다. '부모님이라서'해줄 수 있는 지원이란 수능을 마치며 애진작에 끝났다. 이젠 난 양육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헤쳐나가고 싶었다. 물론 지원을 해준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고 진짜 내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고 받아들였다.


선택. 그게 요즘의 인간의 독립법이 된 듯하다. 독립은 그 자체로 삶이라는 고통에 뛰어드는 선택 같다. 다만 그걸 나처럼 일시불로 뛰어들어서 20대 초반에 하는 사람이 있고,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해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한 후에 할부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뭐가 잘나고 못난 게 없는 세상이다.


다만 나는 20대 초반에 고통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사람으로서 이 생활에 대한 장점을 무수히 나열할 수 있다. 다름이라는 가치는 그 자체로 존중받을 만 하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니까. 나의 기회비용은 부모님의 안전한 재정과 집이었다. 그걸 버리고 현실로 뛰어들어보니 우선 부모님과 평등하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 우리에겐 양육이라는 과거가 있을 뿐, 상하관계란 없었고 존중과 사랑이 남았다. 내게 있어 존중이란, 부모님이 어떤 걸 제안해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가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 지지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한 개체로서 선택을 존중받게 되니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무수히 펼쳐졌다. 동시에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생존의 문제에 당면했다. 어린 시절 무심코 지나친 글쓰기에 대한 꿈을 붙잡아보고, 디자인 외주 업무도 해보고, 그동안 무지했던 경제를 알아보고 책을 읽었다. 내가 봐도 나는 말 그대로 비상을 한 상태인 아기새였다. 사냥은 어떻게 하는지 여기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부모님이 어렴풋이 어릴 때 알려준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혼자 살고 있는 것도 기적 같은데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는 찍어봐야 아는 일이었다.



고통은 일시불 청구가 안된다

지혜는 저장되지만, 삶은 선불결제가 안된다. 암만 삶을 살아가는 스킬을 알아도, 아무리 넉넉한 돈과 함께 시작해도, 직접 살아내지 않는 한 안정은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생이라는 고통은 선불이 안 된다. 영원히 할부로 내야 한다. 100원이 청구될지, 1억이 청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은 예측이 안된다. 그래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택은 '그냥' 시도해보지 않는 한, 절대로 통찰할 수 없다. 그 조언과 사랑을 정성껏 받아먹는 시기가 곧 미성년자이며, 그를 바탕으로 직접 살아내는 시기가 성년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 둥지 안에서는 뭐든 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 잠재성은 호접몽이며 그 가능성 중독의 상태를 스스로 끊고 나와야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진정한 고통이 시작된다. 삶은 좋고 싫음이 아니다. 삶은 삶이라서 좋고 나쁨은 스스로 정의하기 나름이다. 그 자체로 고난이 많음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드는 게 곧 성인으로 비상하는 첫 용기라고 생각한다.


독립에 도움 된 것이 있다면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이다. 그걸 통해 어떻게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지를 체득했다. 부모님은 밖은 무서운 일이 가득하니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몸소 재미있는 일이 어떤 게 있는 지를 알려주었다. 미술관도 가고, 강연도 듣고, 캠핑도 가고, 취미도 하고, 놀러 나가라고 얘기해 줬다. 따라서 종종 힘든 일은 있지만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걸 왜 원하는가를 되뇌며 아주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일단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는 걸 안다. 보류상태로 미뤄두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지금을 살아내야 하니까.


정글 같은 환경에 온몸을 내던지고 알게 된 아주 즐거운 사실 하나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한다는 점이다. 매분매초 생죽사 사즉생의 마음으로 치열하게 사는 게 아니라, 바라는 마음은 있되 그 꿈으로 나아가는 오늘 하루의 지질함을 견디는 힘을 말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독립이란 어디 있겠냐 생각하며 20대 초반으로서의 지질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당연히 이 빈약한 상태가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 뭘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확실히 안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도 오늘 하루를 살아냄이 얼마나 찬란한 일인지를 안다. 어차피 이 하루라는 씨앗의 집합은 미래에 언젠가 피어나기 마련이라 믿는다. 마치 이 브런치 책을 연재하듯 말이다.


오늘 하루가 있어야 미래가 있음을 알기에, 묵묵히 걸어간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자존을 위해.


그게 내가 정의하는 독립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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