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린, 한글 타이포그래피

by 나경

어떤 학문이든, 어떤 분야든 기초가 있기 마련이다. 디자인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기초는 단연 평면 조형력이다. 색과 형태, 비율과 여백, 시선의 흐름을 다루는 능력은 모든 디자인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디자인은 순수 예술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을 가진다. 디자인은 감상을 목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정보와 메시지를 담아 전달해야 하는 상업적 성격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술가가 이미지를 중심으로 세계를 표현한다면, 디자이너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문자까지 함께 다루는 사람들이라고. 디자이너는 시각적 표현 위에 의미를 얹고 그 의미가 오해 없이 전달되도록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디자인의 완성도가 높다고 느끼는 기준 역시 단순한 스타일이나 멋진 표현에만 있지 않다. 아무리 그래픽이 인상적이어도 타이포그래피가 조형적으로 어색하거나 구조를 방해한다면, 작업 전체의 설득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반면 절제된 그래픽 안에서도 타이포그래피가 정확한 위치와 리듬으로 작동하면 그 작업은 훨씬 단단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타이포그래피는 언제나 디자인의 화룡점정이었다.


특히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더 그렇다. 한글은 영어와 조형적 성격이 매우 다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직선과 곡선, 모아쓰기 구조, 음절 단위의 조형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훨씬 많다.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수강하고 과제를 반복해도 이 분야만큼은 쉽게 이제 알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갈고닦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게다가 이 영역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을 가진 작업자들이 정말 많다. 소위 말하는 고인물들이 즐비한 분야다. 그들의 작업을 보다 보면 경쟁심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 먼저 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욕구가 생긴다. 저 이상처럼 보이는 완성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고.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왜 그렇게 설계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나 과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늘 같은 고민을 한다.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는 마치 수능 국어의 문학과 비문학처럼 느껴진다.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지만, 둘 다 완벽하게 잡는 것은 쉽지 않다. 만점이 존재하지 않는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 들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요소를 동시에 붙잡고 가고 싶다는 욕심은 쉽게 내려놓아지지 않는다.



약점 정면돌파

그러던 중 일요일마다 두 시간씩 진행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알게 되었다. 출근을 앞두고 있고, 졸업 준비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잠시 망설였다. 비용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단순히 비싸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흘려보내기에는 마음에 계속 걸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제대로 마주해야 할 영역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사두고 혼자 실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미뤄왔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결국 수강신청을 했다. 이 선택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 하나를 더 배우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기초를 다지고 싶다는 마음에 더 가깝다. 평가와 비교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왜 디자인을 시작했고 무엇을 잘하고 싶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디자인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마지막 한 끗은 결국 타이포그래피라고 늘 생각해 왔다. 이번 선택이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작업에서 더 이상 이 영역을 회피하지 않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그리고 그 확신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충분히 이 선택을 납득할 수 있다.


역린으로부터 더 이상의 도망은 없다. 모른 척하거나, 나중으로 미루거나, 다른 강점으로 덮어두는 방식은 이제 나에게 맞지 않는다. 약점이라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손대지 못했던 이유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은 피해왔고 감추었고 스스로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외면하지 않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성실한 태도라는 걸. 잘해지겠다는 다짐보다 먼저 필요한 건 못한 상태로도 그 자리에 서는 용기라는 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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