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단단해진 바다가

다시 누군가의 파도를 위로할 때까지

by Sophie

1.

여행에 가면 꼭 책방에 들른다. 서점은 안된다. 책‘방’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은 공간. 서울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한 책들을 잔뜩 모아두었으면서 또 재고는 두세 권씩만 채워놓은, 하지만 그 모든 책들을 한 땀 한 땀 읽고 소감을 써 붙여둔 주인이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런 책방은 신기하게도 지역마다 책들의 결이 다르다.


근래 부산에 여행 갈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동행이 있는 여행이었지만 각자 거주지가 달라 홀로 세 시간 일찍 도착했고, 그 틈을 타 빠르게 책방에 들렀다.


책방은 꼭 혼자 가야 한다. 그 누구의 재촉도 없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러다 몇 초간 나를 멈춰있게 만드는 그 한 문장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기하게도 매번 더 나은 책이 있으리라, 하며 책방을 한 바퀴 돌지만 종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오늘도 결국 처음 멈춘 그 책을 들고 카운터에 섰다.

“오늘 처음으로 파는 책이 이렇게 좋은 책이면 어떡하죠.”

책방 주인들이 의례하는 인사치레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무척이나 신나는 표정으로 나를 문까지 배웅하며 또 한 번 말했다.

“내 새끼 잘 부탁드려요!”


고작 바닷가 작은 책방에 들러 책을 한 권 사는 일이었을 뿐인데,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그가 기꺼이 내어준 그의 '새끼'같은 책이 정말 그의 자식이라도 되는 양 움찔대는 것 같았다.


매일 누군가의 생각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진심을 고르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고른 그 진심에 다른 누군가가 공명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얼마나 두근거릴까.


언젠가 내게 주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뜨개방이나 책방을 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책방 할머니로 마음이 조금 기울었다.



2.

기가 막힌 책을 사면 꼭 기가 막힌 커피를 마셔야 한다. 손으로 직접 내린 커피와 신중하게 골라든 책은 언제나 한 쌍이다. 언젠가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그랬는데.

“너도 참 유난이다.“

뭐 어쩌겠어, 여행은 원래 유난이다.

평소에는 소심의 극치인 내가 선택하지 않을 유난들을 모으고 모아 나열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여행인걸.


방금 산 책을 소중히 쥐고 이십분이나 걸어서 핸드드립을 파는 카페에 갔다.


이십 대부터 삼십 대가 되기까지, 일상과 비일상 속에서 마음의 파도가 일 때마다 글을 썼다. 매일 끊이지 않는 사유와 반복되는 감정의 물결이 펜을 통해 음절마다 스며들었다.


날 것의 마음을 꺼내 보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수한 타인의 솔직함에 몰입하고 공감했던 나의 모습을 빌어, 언젠가 일었던 나의 파도가 누군가의 파도일 수 있겠다는 기대 어린 짐작으로 첫 장을 써 내려간다.


지금도 우리 모두는 나름의 방식으로 몇 번이고 부서지고 있을 테고, 나 또한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부서지다 보니 알겠다. 나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라는 것을.

[나의 파도 - 양유진]


카페를 나서면서 고이 남겨둔 몇 장을 공항에서 마쳤고, 주책맞게 조금 글썽였다.


여전히 나를 파도쯤으로 여기고 있는 나는, 몇 번을 더 부서져야 내가 바다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부서지는 매번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치부하는 나는 언제쯤 그것을 크나큰 바다의 몸부림 정도로 소홀히 여길 수 있을까.


내 안의 무수한 파도들이 한데 뒤엉켜 바다를 이룰 때까지.

그렇게 단단해진 바다가 다시 누군가의 파도를 위로할 때까지.



3.

아프리카로 출장 갈 일이 생겨 무려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았다. 내 인생 참 다사다난하다.


접종 후 한 일주일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증이 느껴져 집 앞 내과를 찾았다.

소심의 인간화인 나는 병원 가기 전 대사를 꼼꼼히 준비한다.

“몸살기가 심해서 왔는데요, 상관없을 것 같지만 일주일 전쯤에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았어요.”

한 열 번쯤 연습하고 진료실에 들어가서 기대한 답변을 들었다.

“아마 그냥 감기일 거예요."


처방전을 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 순간 의사선생님이 뛰쳐나왔다.

“혹시 접종을 언제 받았어요?”

“지난주 수요일에요.”

“감사합니다.”

그러곤 유유히 들어가시는 거다.


금세 의아한 마음을 잊고 약국을 나서던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황열병 예방접종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감염내과 선생님께 문의를 드렸는데요, 해당 백신은 생백신으로 실제 균을 주사하는 거라 일주일 후쯤에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시네요. 드린 약 드시면서 하루 이틀 충분히 휴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얼마나 멋있는 말인지.

남은 하루 동안 그 순간을 꼭꼭 씹어 먹으며 살았다.


내가 뱉은 언어의 무게를 아는 어른.

한번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은 끝까지 놓지 않고 책임지는 어른.

죄송합니다,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어른.


너무 늦어버려 의사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런 어른이 되기로 했다.


고작 어른이 된지 일곱해 밖에 안된 주제에 건방지지만, 살다 보면 어른이어서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내가 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하는 것.

내가 주어야 할 정보다 더 깊은 정을 쏟는 것.

내가 들여야 할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들이는 것.

내가 해야 할 말보다 더 사려 깊은 한마디를 건네는 것.


사실 인간은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더 죽어가고 있는 걸지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말이다.


묘하게 별 같은 눈을 가진 어르신을 마주칠 때가 있다. 어른이 된지 벌써 마흔 해가 지나고도 반짝거리는 마음을 가진이의 귀한 순간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렇게 어여쁜 마음으로.

오래오래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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