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고독 1 "불친절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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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헵시바

고씨 집안 장남이었던 고소득은 돈을 버는 일에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설탕과 밀가루를 파는 가게를 그의 기발한 기획과 탁월한 추진력, 뛰어난 사업 수완을 활용하여 국내 식품 대기업 '고(高)'로 성장시켰다. 심지어 운도 따랐다. 누구도 그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무학(無學)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설령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고소득을 무시하거나 그의 학력 콤플렉스를 건들 사람은 없었다. 고소득은 성공한 뒤, 자신의 꿈이었던 일가친척들을 모두 모아 한 집에서 북적북적 살았다. 집안사람들은 무일푼에서 집안을 부유하게 만든 고소득을 존경했고, 고소득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 형제들과 자식들에게 공부 머리가 없더라도 돈이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고소득의 신념은 일가친척들의 가정마다 가훈이 되었다. 그러나 사업에 관하여는 성공했던 고소득조차 성공하지 못한 분야가 있었다.

고소득은 자기 외모를 쏙 빼닮은 아들 고사한이 자신의 회사를 글로벌한 기업으로 키워줄 거라 믿었지만 아들은 아버지만큼 유능하지 못했고 사업에 손을 대는 족족 망하기만 했다. 고소득은 아들에 대하여 기대한 만큼 실망이 컸고 사업에 손해를 끼친 아들의 무능함을 대놓고 욕했다. 아들 역시 아버지의 기대가 짐처럼 느껴졌다. 친척들은 두 부자의 벌려진 틈을 파고들어 이간질하며 잇속을 챙겼다. 마침내 서로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폭언을 쏟아부어 부자관계가 끊어지려는 그때, 또 다른 후계자 고독주가 태어났다.

대기업 창업주의 손자. 이 신분 하나로 고독주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고소득은 손자의 차분하고 함부로 울지 않는 강인한 면을 보고, 자신의 손자가 회사를 더 크게 키울 거라고 확신했다. 고소득을 비롯한 고씨 집안 가족들은 훗날 회사를 이끌 후계자에게 가문의 신념을 틈만 나면 가르쳤다.

하지만 어린 고독주는 의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는 돈이 과연 가장 믿을 만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돈의 필요성에 대해선 일찍이 깨달았다. 돈이 없으면 서점에서 책을 살수도, 어머니 몰래 편의점에서 콜라도 사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등하교를 책임지는 비서를 고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이는 자신의 안전과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 된다. 분명 돈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일도 많았다. 책을 다 읽은 후 느껴지는 감정은 책값 이상의 가치가 있었고, 편의점 누나가 사비로 산 초코바를 자신에게 귀엽다며 주고 간 행동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으로 놀란 자신을 토닥이던 비서의 위로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독주는 '돈이 최고'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만나면 다투기만 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늘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를 경쟁자로 여기는 사촌들, 머리가 좋은 고독주를 후계자답다며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친척들. 고독주는 이러한 약육강식의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자신에게 거는 희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의젓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가족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희망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어린이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늘 집 뒤 대나무 숲 평상에 누워 명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명상을 하던 고독주의 머리맡에 사마귀 두 마리가 날아왔다. 두 사마귀는 그의 눈앞에서 싸우는 듯하더니 교미를 시작했다. 고독주는 생에 처음으로 동물의 교미를 지켜보면서 언젠가 보았던 동물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생각해 냈다.


수사자는 암사자 등 위에 올라탑니다. 교미를 끝내고 나면 암사자는 세 달 후에 귀여운 새끼들을 낳게 됩니다.


고독주는 두 사마귀의 연두색 눈동자를 보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교미가 끝나자 두 사마귀는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암사마귀가 숫사마귀의 머리를 먹기 시작했다. 곤충 중에 교미 후 양분을 위하여 제 짝을 잡아먹는 종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고독주는 한참 동안 숫사마귀가 암사마귀에게 먹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콱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평상 위에는 고독주와 암사마귀만 남았다. 고독주는 티셔츠를 벗어 그것으로 사마귀를 조심스레 싸,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는 플라스틱 통에 사마귀를 넣어두고 잠들 때까지 관찰했다. 다음 날 고독주가 깨어났을 때 사마귀는 산소 부족으로 죽어있었다.

시무룩해진 고독주는 불현듯 눈에 생기가 돌더니, 집게와 커터 칼을 가져와 사마귀의 복부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의사가 개복 수술을 하는 모습 같았다. 고독주는 집게로 이리저리 휘젓다 마침내 암사마귀 뱃속에서 숫사마귀의 더듬이를 발견했다. 고독주는 집게로 더듬이를 보며 미묘한 웃음 지었다. 만약 암사마귀가 알을 낳고 다음 세대가 이어졌다면 그것은 분명 숫사마귀의 죽음 덕분일 것이다. 숫사마귀의 희생은 값진 것이었다. 고독주는 자신의 핏기 없이 하얗고 거친 피부를 메 만지며, 자신 또한 숫사마귀와 비슷한 사명을 지닌 존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할 때 고독주의 손가락이 커터 칼에 베여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자신이 사마귀라고, 곤충이라고 믿으며 자랐을지 모른다.


***


영원수는 4월 4일에 태어났다. 영원수 어머니는 병원에서 그녀를 낳자마자 도망갔다. 병원에 늦게 도착한 영원수의 아버지는 아내가 도망간 사실을 듣고 집 안에 있는 아내 관련 물건을 몽땅 불태워 버렸다. 그는 매우 무책임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남의 집에서 놀다가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원수의 아버지는 한 손에는 아들 손을 잡고 한 팔로는 핏덩이 딸을 안고, 영원수 할머니의 집으로 갔다. 그렇게 영원수는 어머니의 얼굴도, 존재도 모르고 자라는 듯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그녀의 오빠가 그림을 그리며 놀던 동생에게 한 장의 사진을 스윽 내밀었다.

이 여자가 너를 낳은 여자다.

사진 속 여자를 향한 오빠의 말에는 증오와 그리움이 묻어 있었지만, 어린 영원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원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눈물을 자주 훔치는 할머니와 화가 많은 아빠, 감정 기복이 심한 오빠 사이에서 영원수는 자신의 감정도 표출하며 살 수 없었다. 영원수는 사진 속 여자를 보며 입가에서 한 단어가 맴돌았다. 들어보기만 했지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원수는 여덟 살 인생 처음으로 심장 어딘가에서 이상한 감정이 뒤엉켰다. 그래서 사진을 찢어버렸다.

그날 이후 영원수는 더욱 냉소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무서웠다. 마음이란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산수와 달라 계산이 되지 않았다. 연산되지 않는 문제는 풀지 않으리라. 그래서 영원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영원수가 고등학교에 올라간 첫 해에는 그녀의 오빠가 가출을 했고, 다음 해에는 아버지가 사기죄로 수감되었다. 영원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빠는 '이 놈의 집구석 빨리 나가 버릴 거야'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고, 아빠는 밖에서 좋지 않은 행동을 -아마도 불법적인- 하는 것 같았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감옥에 가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었다. 아버지가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사회가 정의를 잘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가족의 일에도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하던 영원수였지만, 그녀도 자신을 범죄자 딸이라며 놀리는 교내 같은 동아리를 하던 여학생에게만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여학생은 동아리 시간에 자신의 친구들에게 영원수를 조롱하자, 영원수는 그녀의 머리통을 칠판에 처박아 버렸다. 여학생은 머리에 수십 바늘을 꿰매야 했다. 영원수는 강제 전학 처분을 받았다.

영원수의 할머니는 손자의 가출, 아들의 수감, 손녀의 전학을 연속으로 겪으며 집안에 삼재(三災)가 터졌다며 매일 울었다. 할머니는 굿을 하기 위해 돈을 마련하려다 크게 다쳤고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영원수의 간병을 받던 할머니는 자신이 손녀의 앞길까지 망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눈을 감으며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원수는 학폭 전력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서류 전형이 통과돼도 면접관은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고 탈락시켰다. 결국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가게로, 가게에서 가게로, 가게에서 다시 집으로. 영원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퇴근 후 세수를 하면 매연에 검게 묻은 콧속 이물질이 나오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었다. 변함없이 같은 시간, 같은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영원수의 눈에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빈 센트 반 고흐 무료 전시회.

영원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스포츠나 악기를 배울 순 없었지만, 그림은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영원수가 쉽게 할 수 있는 예체능 분야였다. 좋아하는 걸 자주 하다 보니 실력도 또래보다 좋은 편이었다. 영원수는 버스 정류장에 붙은 전시회 광고를 보며 고등학교 때 열심히 활동했던 미술 동아리가 생각났다. 영원수는 아르바이트가 없는 휴일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 전시회에 가서야 예술대학 학생들의 모작 전시회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또래가 그린 그림을 보고 나서 일상 때문에 잊고 있던 예술에 대한 욕망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삶을 재편성하기로 결심한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 없었던 영원수는 학원을 다니려고 알아보았지만 현재 생활비로는 학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음료 값만 내면 얼마든지 활동이 가능한 드로잉 동호회를 알아보았다. 동호회 어플에서 드로잉 동호회를 검색하자 무수히 많은 동호회가 검색되었고 그중 영원수의 마음에 쏙 드는 동호회가 있었다. 초보자를 위한 드로잉 동호회. 동호회의 정기 모임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장소는 강남 회운구(灰雲邱)에 있는 대형 카페였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영원수는 동호회 구성원 대부분 낯을 많이 가리고 내향적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러 왔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해 보여서 안도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호회에는 영원수보다 잘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더 초보적인 사람도 있었다. 매주 자유 주제로 각자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서로 보여주며 피드백을 해주었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조언을 해주는 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을 동호회를 중심으로 조정해 갔다. 교통비를 아끼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알바를 했는데 오직 동호회에 빨리 가기 위해 회운구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회운구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뉴스에서 회운구라는 단어만 나와도 동호회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영원수는 유동 인구가 많은 상권이라 알바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주 3회, 하루에 4시간 30분 오픈 근무였다. 주휴수당은 없었지만 금요일 퇴근 후 바로 동호회에 갈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집 근처에서 주 3일, 회운구에서 주 3일을 근무하는 스케줄로 2년째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동호회에 새로 들어온 멤버가 영원수의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분은 초보자 동호회에 나올 실력은 아니신 건 같은데, 피드백하러 오시는 건가요?"


영원수는 그제야 자신이 동호회 안에서 '피드백만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음을 깨달았다. 변화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림 실력 향상을 위해서 초보자 동호회를 그만두고, 중급 레벨의 드로잉 동호회를 알아보았다. 새로운 동호회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실력도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영원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특히 아주 뛰어난 실력의 멤버가 있었는데 그녀는 미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독학으로 영원수가 독학으로 연습한 것을 알아채곤 '창의성은 있지만 기초를 더 다지는 게 좋으니 학원에 다녀보라'라고 조언했다. 영원수는 그녀가 학원 영업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원수는 학원 등록을 고민했다. 하지만 빽빽한 근무 스케줄과 빠듯한 생활비가 발목을 잡았다. 월세·관리비·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있는 휴일도 자신의 체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회운구 카페로 더 출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장은 주휴수당을 주지 않으려 알바를 주 14시간 이상 쓰지 않았다. 아마 카페에서 더 오래 근무하는 건 사장이 바뀌지 않는 이상 불가능 할 것이다.


***


고독주의 부모님은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아들에게, 이제 서른이니 후계를 이어야 한다며 공부는 그만하고 국내로 들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고독주는 미국에서 생물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견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귀국을 미루었고, 한국의 파브르를 꿈꾸며 존경하는 생물학 교수 아래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행복한 연구원 생활을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고사한이 무리하게 기업 인수를 추진하다 실패하여 엄청난 적자를 일으켜 할아버지 고소득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고독주는 부랴부랴 귀국하여 자신이 만회해 보겠다며 할아버지의 분노를 달랬다. 학력 콤플렉스가 강했던 고소득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손자가 고사한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며 회사를 맡겼다.

고독주는 기획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임원들은 생물학 전공을 한 재벌 후계자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3년 안에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비아냥댔다. 그러나 고독주는 아버지와 달리 능력이 있었고,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할아버지 고소득보다 영리하고 탁월하게 기획했고, 주변 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추진력과 인맥이 성공의 지름길이던 할아버지 시대와 달리, 고독주가 사는 시대는 합리적 기획과 효율적인 사업 진행이 성공의 요소였다. 그의 경영 방식은 교미를 마친 암사마귀가 영양을 위해 숫사마귀를 사냥하는 극도의 효율성을 닮아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전략기획본부장이 되었다.

회운구 회운산을 등진채 지어진 한옥 저택이 있다. 바로 고소각(高少閣)이다. 고소각은 고소득의 집을 뜻했다. 대문을 지나 쭉 올라가면 고소득이 머무는 고소전(高少殿)이 나오고, 양 옆으로 고소득의 자식들과 형제들이 살고 있었다.

고소득은 아침 식사를 중요시하며 가족들 모두가 함께 밥 먹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고씨 집안사람들은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고소전으로 모였다. 6시 55분. 기다란 식탁의 상석은 비워 있었고, 상석의 오른쪽에는 고소득의 아내, 옆에는 고소한과 고소한의 아내가 자리했다. 맞은편에는 고소한의 여동생과 남편, 아래쪽에는 고사한의 남동생과 아내. 그 아래로는 고소득의 형제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식탁은 빈틈없이 음식으로 채워졌고, 7시가 되자 고소득이 헛기침을 하며 뒷짐진채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일어나 창업주를 맞이했고, 고소득이 상석에 앉은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고소득은 맏며느리 옆 자리가 비어져 있는 것을 보고, 희고 긴 숱 많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고독주가 들어온다.


"이제 오나."

"할아버님. 오늘은 먼저 출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와."


며느리인 지영은 아들 대신 담담히 답했다.


"회사에 중요한 일이 생겼답니다."


며느리의 대답을 들은 고소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주도 할아버지의 수긍하는 표정을 보고 나가려 했으나, 고모 고우나가 독주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새빨갛게 그린 입술 한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독주 쟤가 저렇게 정이 없어요. 가족끼리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마, 시끄럽다. 사내가 밥보다 회삿일이 중요하지."

"증권가에서 헛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그 탓에 주가가 떨어졌답니다."


새언니 말에 고우나가 지영과 고독주를 한 번씩 흘겨본다. 지영은 고우나를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가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아버님."


흰쌀밥을 크게 떠먹으려던 고소득이 수저질을 멈췄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식사를 멈췄다. 고소득이 숟가락을 집어던진다.


"뭔 말이가!?"


식탁 위로 밥풀이 흩날렸다. 아버지의 큰 소리에 긴장하던 고우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아니, 아부지. 동문이가 여자애를 만났는데, 그 여자애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나 봐. 동문이 걔가 좀 순수한 면이 있잖아. 그래서 몇 번 놀다가 동영상이 찍혔..."


고우나는 말하다가 고소득의 표정을 보고 뒷말을 마무리지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옆에 앉아있던 사위도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아야 했다. 지영은 고우나의 머리가 나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소득은 고우나와 사위를 보고 얼굴이 붉어졌고, 핏줄이 곧 터질 폭탄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때 고소득의 차남 고사진이 슬쩍 끼어들었다.


"동문이는 일본 출장 보냈습니다. 여자 애랑은 협상 중이고요. 언론 타는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고소득의 아내 옥명이 다들 식사나 하라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고 혈압이 올라 밥을 먹다 멈춘 남편을 달래기 위해, 쌀밥 위에 고사리 무침을 얹어 주며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당신 닮아 여자한테 약해서 그런 거니, 동문이 너무 나무라진 마세요."


고소득이 옥명의 말에 헛기침을 했다. 옥명이 며느리 지영을 흘겨보다가, 인자한 얼굴로 손자에게 말했다.

"바쁠 텐데 얼른 출근해라. 고생하고."


고독주는 인사하고 나섰다. 현관에는 김 비서가 서 있었다. 그는 까만 정장 구두를 꺼내 독주의 발 앞에 두고, 현관문을 열고 기다렸다. 그때 뒤 따라 나온 지영이 아들을 불러 세웠다.


"....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고모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지영은 아들의 재킷을 여미며 가슴을 툭툭 쳤다. 고독주는 할머니와 고모를 차분히 대하는 어머니를 강인한 전략가라 생각했다. 어머니의 인내는 단순히 며느리로서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위한 일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고독주는 지영 뒤로 고우나가 다가오는 것을 본다. 고우나는 5분 전 당황하고 씩씩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애원하는 표정으로 고독주에게 다가가 손을 꼭 붙잡고 말한다.


"얘 독주야, 동문이한테는 너밖에 없어. 걔가 형이 있기를 해, 누나가 있기를 해. 형제라곤 사촌인 너밖에 없잖아."


고우나는 집안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조카를 싫어했지만, 고독주는 속이 뻔히 보이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관계로 인해 편한 사이는 될 수 없었다. 고독주는 그녀의 차갑고 얇은 피부를 느끼며 고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나갔다. 김 비서가 두 여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


회사는 고소각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오늘은 급히 회사로 출근해야 했기에 김 비서가 직접 운전을 했다. 김 비서는 1층 로비에 고독주를 내려주며 말했다.


"지하에 주차하고 가겠습니다."


고독주는 눈빛으로 긍정의 사인을 보내고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보안팀 직원 두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독주는 한산한 분위기에 자신이 김 비서 없이 로비를 지나쳐 본 적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순간 허기가 밀려왔다. 매일 정확한 루틴을 지키며 사는 그에게 지금은 아침밥이 채워져야 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길들여진 배꼽시계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다행히 1층 카페 불이 켜져 있었다.

딸랑.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한 명 있었다. 배가 고파 메뉴판부터 보았다. 아침 식사 대신 먹을 만한 메뉴로는 샌드위치가 있었다. 고독주는 닭가슴살 리코타치즈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포장해 놓으면 비서가 와서 찾아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로 올라갈 참이었다. 그런데 카페 직원은 카드를 받다 고독주의 말에 인상을 썼다. 직원의 표정은 고독주의 눈길을 끌었다. 할아버지 이외 사람들에게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카페 직원은 고독주와 카드를 사이에 두고 말했다.


"찾으러 오는 사람이 손님 비서인지 제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원수의 말에 고독주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반응에도 영원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였는지 고독주를 빤히 바라봤다. 고독주는 난생처음 겪어본 대화의 흐름에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했다. 평소대로라면 자신이 지시하고 직원은 알겠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렇게 대화가 깔끔하게 마무리 됐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고독주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고독주는 그녀의 앞치마에 달린 이름표를 보았다.

영원수.

여타 사람들은 -고모 고우나 같은 사람들- 이 상황에서 직원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고객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고, 태도 역시 거슬린 만한 것이 없었다. 고독주가 보기에 그녀는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합리적이면서도 남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을 뿐이었다. 고독주는 그렇게 그녀 -아침부터 일찍 출근한 이유도 잊어버릴 만큼 당황스러운 일을 선사한- 의 첫인상을 결론지었다. 손목에 차있는 두터운 은색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여기서 먹고 가겠습니다."


영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을 마쳤다. 고독주는 창문을 등지고 주방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그녀를 바라보던 중 김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본부장님 어디세요?]

"먼저 일 해."


전화를 끊고 태블릿을 꺼내 업무 파일을 보다가 다시 영원수를 흘깃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탬핑 중이었다. 잠시 후 영원수는 '1번 고객님,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독주는 일어서서 픽업대로 다가갔다. 영원수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트레이를 받는 순간, 그녀의 검지 끝이 잠시 스쳤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이었지만 닿은 그녀의 검지 끝 마디는 에스프레소를 내렸던 손이어서인지 따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