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nald Nov 10. 2020

매혹적인 주인공이 들려주는 매력적인 이야기, 퀸스 갬빗

넷플릭스 <퀸스 갬빗> 시즌 1 리뷰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하먼은 무표정한 얼굴로 공항으로 향하던 차를 세웁니다. "좀 걷고 싶어서요."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얼굴엔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된 듯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모습을 하고 있고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입김을 통해 차가운 공기가 온몸으로 전해지죠. 그리고 그 순간 희망차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밝은 분위기의 음악이 배경음으로 깔리고 곧 공원에 들어선 베스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의자를 가득 채운 체스 두는 노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는 체하는 시민들은 눈 깜짝할 새에 그녀를 에워쌉니다. 그리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베스는 그중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경기를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두시죠."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미소를 머금고 있던 베스의 얼굴에 순식간에 진지함이 드리워집니다. 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눈빛이네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스 갬빗>은 익숙한 조합을 가지고 흥미진진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주인공인 베스 하먼은 체스 신동이지만 모부의 부재라는 결핍을 안고 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 완벽한 천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체스 신동이 세계적인 체스 선수로 거듭나는 동안 그녀의 중독과 의존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하게 되죠. 그리고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천재들이 늘 그렇듯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대국을 벌였던 상대들과 동침을 서슴지 않고 프랑스 여자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베스 하먼이라는 캐릭터에 매력이 한 스푼 더해지는 순간이죠.


이 드라마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인 베스 하먼이라는 캐릭터가 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천재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등장하는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나 언어 천재 빌라넬이 나오는 <킬링 이브>는 어떤 커다란 사건이나 악역, 그리고 상대 캐릭터(예를 들자면 <킬링 이브>의 산드라 오)에게 무게 중심이 분산되지만 <퀸스 갬빗>은 베스 하먼 역의 안야 테일러-조이를 그야말로 원톱으로 내세웁니다. 체스는 그녀의 천재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며 드라마 중 로맨스는 가끔 이야기를 거들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은 베스 하먼이라는 캐릭터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테이블 맞은편에 있는 상대를 한 명씩 해치울 때마다 쾌감을 느끼며 점점 더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퀸스 갬빗>은 베스 하먼이 다 하는 드라마예요.


이 드라마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퀸스 갬빗>은 체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지만 체스에 대해 전혀 몰라도 된다는 점입니다. 꽤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실리안 디펜스'나 '퀸스 갬빗'같은 체스 용어는 물론 비숍이 뭔지 나이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심지어 킹과 퀸이 헷갈릴지라도 이 드라마를 즐기는 데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력과 두 인물이 스피디하게 체스를 두는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매혹적인 주인공이 스크린을 압도하기 때문이에요.


영상과 편집이 가장 돋보였던 The U.S. Championship

하지만 <퀸스 갬빗>의 마지막 화는 제게 뒤통수를 친 에피소드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시즌 '1'이라는 숫자에 기대어 승승장구하는 베스를 보면서도 그간 자연스럽게 다음 시즌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은 한치의 여운도 남기지 않은 채 드라마의 완전한 종결을 암시했기 때문이에요. 구글 창에 'Queen's gambit season 2'라는 단어를 타이핑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말이죠. 시대 배경이 요즘이라면 베스 하먼 vs AI의 대국이라도 해 달라고 어떻게 우겨볼 텐데 이 드라마의 배경은 안타깝게도 1960년대이고 "그.. 그렇다면 프리퀄이라도..!"를 다급하게 외쳐보지만 그건 진즉 에피소드 1에서 다뤄졌죠. 신시내티, 멕시코, 파리, 러시아에서 굵직한 대국이 치러졌지만 매 에피마다 회를 넘기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된 방식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결말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청자들은 아쉬워서 오열할지언정 그로 인해 이 드라마는 가장 <퀸스 갬빗> 다운 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음 시즌은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어쩌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네요.


체스 '천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퀸스 갬빗>은 보는 내내 요즘 드라마를 보며 흔히 느낄 수 있는 '공감' 같은 단어를 떠올리긴 어려웠지만 캐릭터, 스토리, 연출을 통해 순수하게 이야기를 이야기로 소비하고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단 점이 무엇보다 가장 반갑고 즐거운 드라마였습니다.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으니 러닝타임이 7시간인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 든 건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매거진의 이전글 셀린 시아마가 그려낸 여성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