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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ug 29. 2020

셀린 시아마가 그려낸 여성의 이야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에 대하여

올해 1월에는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배경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브르타뉴의 외딴섬을 무대로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더없이 절제되고 말도 안 되게 압도적인 영화였다. 두 주인공이 감정선을 더듬어가며 마음을 주고받는 장면에선 온 마음을 빼앗겼고 마지막 씬과 함께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이 터져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관람한 날이었고 이 날 이후로 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팬이 되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이하 불초상) 14만이란, 예술 영화로는 이례적인 관객수를 동원하며 꽤 장기간 동안 극장에 걸렸고 비평가들의 호평과 팬들의 n차 관람 인증이 이어지며 입소문을 타고 개봉 초반에 비해 오히려 상영관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수입사인 그린나래미디어는 관객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불초상 굿즈를 제작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고 상영이 종료된 후 3월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의상/원화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속적인 팬들의 호응에 힘 입어 몇 달 후에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인 영화 <톰보이>와 <워터 릴리스>가 차례로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각각 2011년, 2007년에 제작된 영화로 무려 10여 년 전의 영화들이다.



영화 <톰보이>와 <워터 릴리스> 포스터

두 작품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너무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아, 이제는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장인과도 같은 기술을 뽐낸다. 스크린을 보는 동안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부끄러운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감정들이 꽤 여러 차례 스쳐 지나가는데 이를 테면 마음에 드는 친구를 가까이하기 위해 대담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라던지(톰보이) 본인 스스로도 난데없이 피어오른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지만 어떤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거침없이 실행으로 옮기기도 하는 모습(워터 릴리스)이 그렇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마주할 때면 조금 괴롭기도 했지만 더없이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잘 짚어내어 영화로 꿰어내다니..! 이 감독이 스스로의 감정에 더없이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 건 결코 무리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영화 <워터 릴리스> 스틸 컷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워터 릴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씬으로는 플로리안(아델 에넬 분)이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참관을 온 마리(폴린 아콰르 분)에게 물속에서 봐야 더 잘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음악에 맞춰 군무처럼 때론 절도 있게 때론 우아하게 동작을 맞추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수중발레의 역동성과 절제미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하지만 물 바깥에서 보는 아름다운 동작과는 별개로 수중에서 선수들이 그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 구르는 광경을 마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된다. 마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마리에게 플로리안이 스윽 다가와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듯 말이다.


톰보이-워터 릴리스-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는(제작 순으로는 워터 릴리스-톰보이-불초상이 맞겠지만) 아동기-청소년기-성년기로 이어지는 레즈비언의 성장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참고로 셀린 시아마 감독은 커밍 아웃한 레즈비언이며 <워터 릴리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연 배우 아델 에델은 14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과 연인 관계임을 공표하며 커밍 아웃했다.) <워터 릴리스>나 <톰보이>가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전작에 비해 무척 극적이고 아름다운데 세 퀴어 영화 플로우를 통해 다소 부끄럽고 다듬어지지 않은 과거를 통과한 한 여성이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메일 게이즈(=남성적 시선)나 대상화로부터 여성이 자유로울 때 대화나 시선 처리, 그리고 (기존과 다른) 섹스신을 통해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섬세하고 풍부하게 그려질 수 있는지, 또한 그 장면들이 여성 관객들에게 어떤 편안함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통해 감독이 여성 이야기의 경계를 얼마나 확장했지를 따져보면 우리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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