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 리뷰 / 고레에다 히로카즈
현실 세계에서 영화 취향이 같은 친구 찾기를 포기한 이후론 주로 혼자 극장에 간다. 좋아하는 감독이 만든 영화나 배우가 출연했단 소문이 들려오면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편이고 별로 관심 없던 영화가 좋아하는 팟캐스트에 소개될 때면 없던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 다행히 영화는 혼자 즐기기에 무리가 없는 오락인지라 그렇게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길 때마다 나는 부지런히 극장을 찾았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박...' 이란 한 단어가 읊조려지던 날은 수일 내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하기도 했지만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누군가가 떠올라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이거 완전 A 스타일의 영환데?' 혹은 '이 영화를 보고 B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같은 생각이 들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 재개봉 소식이 들려오자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 생각나는 얼굴이 있어 망설임 없이 나는 바로 예매 버튼을 클릭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처음 본 건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영화의 스토리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전반적으로 잔잔하지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단 기억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주말에 엄마와 함께 파주 명필름을 찾았다. 영화 상영 후에는 이슬아 작가의 씨네토크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의 기일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때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족이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인 날이면 마치 기다렸단 듯 불편한 상황도 하나둘 연출되기 마련인데(인생에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온 가족이 모여 불유쾌했던 명절의 풍경을 한번 상상해보자.) 가령 마음속에 꾹꾹 담아뒀던 말이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상황 같은 것이 묘하게 맞아떨어져 해선 안 될 말이 툭하고 튀어나온다던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결국 확인하게 될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래. 다음 명절은 아무래도 건너뛰는 게 좋겠어.." 같은 말을 서슴없이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듯 머지않아 료타(아베 히로시 분)는 이 날을 떠올리며 이런 대사를 중얼거리게 된다 "늘 이렇다니까. (걸어도 걸어도) 꼭 한 발씩 늦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라는 한 문장을 시작으로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타이밍이던 전달 방식의 차이이던 내가 하려던 말 100이 (120까진 아니더라도) 다른 가족에게도 온전한 100으로 전달되는 경우는 얼마나 드물까. 결국 그렇게 조금씩 어긋나다가 처음 의도한 100에 90도 다 전달하지도 못한 채 항상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게 되는 관계가 가족 아닐까. 생전에 감독의 장래를 무척 걱정하셨다는 감독의 어머니는 결국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전에 쓰러지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를 어머니가 보셨더라면 조금은 덜 걱정하지 않으셨을까 라고 후회하는 마음이 씨앗이 되어 <걸어도 걸어도>가 탄생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찍어두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들기 시작했다지만 이 영화가, 나름 상실의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훗날 감독은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엄마이자 할머니 역할을 맡은 키키 키린 씨는 그야말로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우리가 익히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려지는 모습들, 이를테면 부엌에서 식사 준비하는 씬을 더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겐 잔소리쟁이의 역할을, 며느리에겐 얄궂은 시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장남 대신 세상에 남은 요시요에겐 내년에도 꼭 오라고 웃으며 인사하지만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는 아들 료타의 말에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고통스러워도 되지 않겠냐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씬은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으로 꼽을 수 있겠다
영화가 상영된 후에는 약 1시간 동안 이슬아 작가의 씨네토크가 이어졌다. 이슬아 작가가 연재하는 <일간 이슬아>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단골로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생생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영화와 관련해 어떤 이야기가 더해질까 궁금증이 일었다. 손녀인 그녀 마저도 미스터리하게 느껴지는 부부, '무엇이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친할아버지와 '무엇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친할머니의 이야기나 복희 씨(이슬아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를 사진 자료까지 첨부해 이야기해 주었고 정향자 할머니의 노래 파일까지 미공개 자료를 듬뿍 방출해준 날이었다. 얼마 전, 예능 <아무튼 출근!>에서 이슬아 작가를 화면으로 만난 엄마도 작가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셨다.
이 날 난생처음 엄마와 파주를 갔던 나는 시간 계산을 잘못해 달려도 달려도 결국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거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는 길에 폭우까지 만나 정말 아슬아슬하게 입장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놓쳐버린 20여분을 씨네토크로 부지런히 메우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쇠한 기력을 맛있는 저녁으로 보충했다. '어긋남'에 관한 영화를 보러 가다가 삐걱삐걱 어긋난 하루를 부지런히 채운 하루로 기억될 것 같다.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지만, 어긋난 부분을 찾아 부지런히 메워 나가는 게 결국 인생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