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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Jan 02. 2019

가까운 레스토랑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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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음식점에 갔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근사한 이유를 댈 수도 있겠으나 이 날은 단지 가까워서가 되겠다. 베르사이유에 방문한 날이었다. 엄청난 인파를 따라 궁전 앞에 도착했더니 그곳에는 더 어마어마한 대기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쩌지, 이제 시작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일정한 속도로 궁전을 구경했다. 행렬의 흐름에 몸을 싣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니 마치 콘서트장에 온 기분이었다.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에서는 사람들 머리 위로 셀카봉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 다시 파리 시내에 도착한 건 이른 저녁이었다. 카메라가 든 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더니 허리가 아파 더 이상 걷는 게 힘들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검색해둔 음식점을 찾아갔더니 그 날 저녁 예약이 꽉 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장 별다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우리는 일단 근처에 있던 APC 매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당연히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현기증이 날 것처럼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근처에 있는 음식점이라도 찾아보려는 마음에 나는 먼저 가게를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막 영업을 시작한듯한 레스토랑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고 메뉴에는 스테이크라는 글씨가 보였다. '여기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친구를 낚아채듯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주문을 받은 프랑스인 직원이 유독 친절한 곳이었다. 메뉴에 대해 이것저것 물을 때마다 '이걸 어떻게 통역하지..'라는 곤란함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직원은 최선을 다해 영어로 메뉴를 설명해줬다. 애피타이저 하나와 메인 메뉴 두 개, 그리고 와인을 시켰다. 그 날은 거의 일 년을 기다리던 영주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쨌든 축배를 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우리는 기분 좋게 잔을 부딪히고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음식은 맛이 없었다. 스테이크는 질겼고 직원이 추천해준 낯선 이름을 가진 프랑스식 애피타이저는 입맛에 맞지 않아 반 이상을 남겼다. 각자 시킨 와인잔만이 오직 깨끗하게 비워졌다. 가까워서 간 레스토랑에서 결국 우리는 비싸고 입에 맞지 않는 스테이크를 잔뜩 먹고 문을 나섰다.



며칠 뒤, 근교 여행으로 겐트를 다녀온 날이었다. 브뤼셀 시내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눈 앞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로 비를 피해 이후 일정을 정리하는데 빗방울의 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예정대로 숙소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가는 건 불가능해 보여 우리는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구글맵에서 평가가 괜찮은 곳들은 폭우를 뚫고 가기엔 거리가 꽤 됐고 한 곳을 겨우 찾아갔더니 대기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가리켰다. "저기 갈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을 달려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으로 보이는 것보다 레스토랑은 더 중후한 멋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잘 관리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고 아늑한 분위기가 레스토랑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직원 한 명이 반갑게 인사하며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진지하게 메뉴판을 보던 우리는 스테이크와 홍합 요리를 주문했다. 테이블로 곱디 고운 버터와 빵이 서빙되었고 그저 버터와 빵일 뿐인데, 어쩌면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곳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예감에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주문한 스테이크와 홍합 요리가 테이블로 전해졌다.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에 맞는 굽기로 잘 요리되어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했다. 나이프가 모처럼 기분 좋게 미끄러져 나갔다. 스테이크를 한 점 먹자마자 나는 동그란 눈을 뜨고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맛있어!라고. 이번에는 다행히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레스토랑은 브뤼셀에서 꽤 유명한 레스토랑이었고 나는 이번 여행(파리-브뤼셀-암스테르담으로 계획된 여행이었다.) 통 틀어 가장 맛있었던 식사로 이 곳을 꼽는다. 만약 2018년 베스트 스테이크 어워즈가 있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브뤼셀에서 먹은 이 스테이크에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함께 했던 친구는 브뤼셀 숙소 근처에서 먹은 벨기에 전통 음식점을 최고로 꼽았다. 파리 레스토랑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그 경험을 토대로 브뤼셀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한 벨기에 전통 음식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여행지에서 우연에 기대어 흥미진진한 사건이 발생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날은 단지 가깝다는 이유로 호기롭게 그 날의 운세를 시험해보기도 하고 보기 좋게 실패한 날은 그다음 일정에 열과 성을 다한다. 물론 겁도 없이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고 낯선 레스토랑에 발을 들여놓기도 한다. 하지만 촘촘한 계획들 사이에 있는 공백들이 더 이상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예약이 꽉 찰 지언정 나락으로 떨어지고 우리를 구해줄 가까운 레스토랑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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