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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Feb 08. 2023

시드니에서 여름을 나는 법

집에서 파란색 333번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한 비치에 도착한다. 날씨가 화창한 주말이면 이 길쭉한 파란색 버스는 승객들로 가득 차는데 유모차와 함께 나들이를 가는 가족, 커다란 비치백을 들고 있는 커플, 짧은 청바지에 비키니 차림을 한 사람들이 마지막 정류장인 본다이 비치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더해진다. 도중에 내리는 사람은 도무지 없고 길쭉한 버스가 더 이상 승객을 태울 수 없는 정도가 될 즈음이면 마침내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단 듯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승객들을 바라보다가 거대한 흐름에 몸을 실어 서둘러 커다란 비치백을 들고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정류장에서 몇 발자국 걸어가면 눈앞에 커다란 바다가 펼쳐진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적정한 때를 기다리는 서퍼들과 함께.


어영부영 연말을 보내고 새해가 되자 지난 12월 동안 바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지난 12월에 유독 흐린 날이 많기도 했고 연말이라 바쁘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게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특별히 못 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으른 스스로를 탓하며 이렇게 여름을 흘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1월에는 매주 비치에 가야겠다는 작은 새해 목표를 세웠다. 마침 1월 2일이 대체공휴일이었기 때문에 방금 막 세운 새해 결심을 시작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이 날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 진 잔디밭에 앉아 신나게 파도 타는 서퍼들을 구경했다. 구름처럼 새하얀 파도가 밀려오면 기다렸단 듯 멋지게 서핑보드에 올라타 실력을 뽐내는 서퍼들을 구경하다가 가져간 이북리더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면 (주말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시간이 참 잘도 간다는 생각이 든다. 안락한 집에서 커피를 내리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좋지만 여름날이라면 약간의 귀찮음을 무릅쓰고 바깥으로 나와 탁 트인 뷰를 눈앞에 두고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쪽이 여러모로 더 즐겁다. 게다가 본다이 비치에는 파도를 잘 타는 서퍼뿐만 아니라 신나게 파도를 타다가 깜쪽같이 사라지는 서퍼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니까 짜파게티 요리사를 하고 클로벨리에 다녀온 날

본다이와 맨리가 서핑을 위한 비치로 유명하다면 시드니에서 스노클링을 하기 좋은 바다로는 클로벨리와 셸리가 있다. 두 곳 모두 해안선이 깊고 폭이 좁은 비치이다 보니 파도가 없고 수심이 깊지 않아 수영을 하기에도 커다란 바위틈에 숨어있는 물고기들을 관찰하기에도 좋다. 나는 물놀이를 좋아하지만 동시에 물을 굉장히 무서워하기도 해서 매번 물에 들어갈 때면 항상 긴장을 하고 마는데 이렇게 얕은 물에선 그래도 조금 안심하게 된다. 수영장에선 잘 안 되던 헤드업 수영이 바다에선 아무래도 더 쉽기도 해서 거기서 거기를 파닥 거리며 오가다가 물에 친숙해졌다 싶으면 스노클 기어를 끼고 더 먼 곳으로 나가본다. 이 날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에 정신이 팔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갔더니 종아리만큼 큰 물고기를 만나 숨을 멎을 뻔하기도 했다. 스노클링에 취미가 없고 그냥 잔잔한 물에서 수영을 즐기고 싶은 분이라면 리틀 맨리나 발모랄 비치도 추천한다.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산다는 건 퇴근 후 비치에서 다녀올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시드니에선 차로 운전해서 30분 정도면 웬만한 비치에 닿을 수 있는데 여름은 오후 8시까지 대낮처럼 밝은 계절이기도 하니 퇴근하고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석양을 바라보며 바닷가에서 피크닉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온이 연일 30도를 넘던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퇴근 후에 KFC를 사들고 한적한 파슬리 비치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날 한 거라곤 바닷가를 산책하고 커다란 비치 타월 위에 앉아 치킨을 먹으며 수다를 떤 게 전부지만 시골집에서 평상 위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여름을 나는 것처럼 시드니에선 저녁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맛볼 수 있는 여름맛이 있다.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삶이 있다면 제철 과일을 먹듯 제철 (물)놀이를 최대한 열심히 즐기는 것이 좋다.


어느새 마트에서 세일 중인 선크림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하나쯤은 여유분으로 쟁이는 사람이 되었다. 온몸에 충분히 선크림을 바르고 그리고 그걸 여러 차례 덧바르다 보면 선크림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소진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살면서 얻게 된 스킬이라면 365일 선글라스를 챙기고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는 능력이 아닐까. 친구들이 시드니에 여행을 온다고 하면, 그리고 특히나 물속성을 가진 친구들이라면 나는 무조건 여름을 추천한다. 선글라스와 선크림을 챙겨서 매일매일 크고 작은 비치에 가면 된다. 여름의 시드니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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