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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Nov 22. 2019

고오급 돈가스가 생각나는 날엔,

망원동 망원우동

음식에서 고급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 어쩐지 이제는 조금 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릴 적이라면, 조금 더 당당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대부분의 행동을 동경하고 그들의 경제력과 권력에 의지하던 시절이라면 말이다. 이를 테면 갈색의 뜨겁고 쌉싸름한, 달짝지근한 커피 같은 것들도 그랬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한가한 오후가 되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들과 일명 커피 타임을 정기적으로 가지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초등학생인 내 앞으로 할당된 커피는 당연히 한 모금도 없었고 그래서 나는 엄마가 다 마시고 난 커피 잔을 거의 거꾸로 뒤집어 바닥을 싹싹 핥았다. 갈색의 커피 방울이 혓바닥에 닿을 때면 이국적인 낯선 맛을 음미하느라 초딩인 나는 무척이나 분주했다. 그때 맛 본 커피의 맛은 그야말로 신비롭고 고급진 맛이었다. 어른의 것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랬듯 말이다.


내가 성장하던 90년대에는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으레 동네 중국집이나 숯불 갈빗집을 찾았다. 온 가족이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외식 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던 시기였고 지금은 우리 생활과 무척 밀접한 햄버거, 피자 같은 음식들이 막 유입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제는 각종 배달 어플로 온 나라의 음식을 주문을 하는 시대에 통닭집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알록달록한 전화번호부 같은 것을 뒤지던 시절이, 이제는 너무나도 아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설레는 날은 바로 동네에서 유일한 경양식집 로비에 가는 날이었다. 입학식 같이 나 혹은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면 엄마는 우리들의 취향에 따라 그날 갈 음식점을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주셨고 그러면 오빠와 나는 어김없이 로비라고 크게 대답하곤 했다. 집에선 맛볼 수 없는 함박스테이크와 돈가스를 주메뉴로 내세우는 곳이었다. 돈가스에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색의 돈가스 소스가 뿌려졌는데 그 조합이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비엔 다른 음식점에선 볼 수 없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널찍한 공간에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어두침침한 오렌지색 조명, 커다랗고 푹신한 소파, 잘 차려입은 웨이터, 테이블 위로 깔린 새하얀 식탁보가 그랬다. 오빠는 함박스테이크, 나는 돈가스를 주문하면 식전에는 후추가 솔솔 뿌려진 양송이 수프가 먼저 준비되었고 따뜻하게 데워진 모닝빵이 함께 서빙되었다. 버터나이프라는 자그맣고 귀여운 칼로 모닝빵에 어설프게 구멍을 내고 거기에 버터를 넣으면 따뜻한 빵 속에서 버터가 사르르 녹았다.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나이프를 사용해 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우아하게 함박스테이크를, 그리고 돈가스를 네모나게 썰었다. 그래서 로비에 갈 때면 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돈가스는 그야말로 내게 고급, 아니 고오급 음식이었던 것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자 나는 이제 돈가스 앞에 고급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주저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있던 로비는 폐업한 지 오래고 이제 돈가스를 먹으며 고급스러움을 찾는 건 좀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얇고 커다란 돈가스가 그립다면 동네 김밥천국에 가면 될 테지만 그걸로 성에 찰 리가 없다. 그래서 수고를 감수해 정광수의 돈까스 가게 같은 곳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지만 어릴 적 향수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그 사이에 내가 너무 까다로운 기준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의 나라면 김밥천국의 돈가스도 분명 좋아했을 텐데. 그저 나가서 먹는다면 무엇이라도 좋았을 때였다.




그렇게 추억의 돈가스를 찾다가 갈 길을 잃은 날이면 나는 이제 망원우동에 간다. 망원우동에서 경양식집에서보던 고급스러움을 찾아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어수선하기로 치면 오히려 김밥천국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진 않은 곳이다. 간격이 좁게 다닥다닥 붙은 나무 테이블과 겉면이 해어진 빨간 의자가 있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온 학부모부터 가락국수와 우동의 중간쯤 위치하는 면 굵기를 뽐내는 우동을 드시러 온, 나이 지긋한 망원동 노인 분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들이 망원우동을 찾는다. 망원동에서 꽤 유명한 맛집인 망원우동을 블로그나 SNS에서 보고 일부러 찾아온 20~30대도 수두룩하다. 한 공간에서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을 볼 수 있는 음식점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음식점들이 주 타겟층이 특정 세대인 것에 비하면 망원우동의 풍경은 다른 의미로 정겹기까지 하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와 함께 망원우동을 찾았다. 국자로 한 번 크게 뜬 진갈색의 돈가스 소스에 돈가스를 살짝 찍었다가 어떤 조각은 튀김옷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담갔다가 먹는다. 고급스럽진 않지만 분명 추억의 맛이다. 게다가 쑥갓이 들어간 우동은 얼마나 얼큰한지 중간맛을 택했음에도 새빨간 다대기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한다. 돈가스를 분주하게 집어 먹는 와중에 우동을 후루룩후루룩 면치기 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기분 좋게 맥주잔을 부딪히고 뜨끈한 우동 국물을 한 번 마신다. 이제 돈가스는 더 이상 어릴 적의 고오급 음식이 아니지만 대신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 맥주잔을 부딪히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식당에 가기 전에 옷차림을 신경 쓰고 조심조심 나이프 질을 하는 대신 거나하게 한 잔을 걸쳤음에도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운 날엔 마지막 코스로 망원우동에 들른다. 돈가스를 바쁘게 썰고 앉아 뜨끈한 우동을 기다린다. 어릴 적 가장 좋아하던 음식인 돈가스가 이젠 더없이 친숙한 술안주가 되었다. 돈가스가 고오급 음식이 아니란 사실이 더 이상 아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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