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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r 17. 2020

맥시멀리스트만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다

랜선 봄맞이와 이사, 그리고 중고책 판매기

최근에는 SNS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중이다. 핸드폰 화면으로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매화 사진이었다. 벌써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에는 동백꽃이 그리고 이제 제주에는 벚꽃이 피고 있다는 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시간이 정지해있거나 혹은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요즘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어렴풋이 계절을 가늠해보지만 어느 누구도 따스한 봄이 오고 있음을 만끽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바깥에 나간다 하더라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용무를 마치면 서둘러 귀가하기 바빠 얼굴을 불쑥 내민 꽃봉오리에 시선이 두기엔 아무래도 심적 여유가 없다. 내게 2020년은 원더키디의 해가 아니라 랜선 봄맞이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꽃봉오리가 움트는 시즌이 되자 친구들은 하나둘 이사 소식을 알려왔다. 조금 서둘러 벌써 이사를 마친 친구도 있었고 3월 말쯤에 이사가 예정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이사 시기와 관계없이 친구들이 하나같이 탄식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끝도 없이 나오는 짐, 살림살이에 관한 한탄이었다.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무리 옷장을 뒤져도 분명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는데 왜때문에 서랍장에선 끝도 없이 의류가 쏟아져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고 서랍 속에선 언젠가 한 번은 쓸 것 같아 버리지 않은 소품들이 마치 유물처럼 계속 발굴된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커다란 쓰레기 봉지를 꽤 여러 차례 바깥으로 내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린 것보다 버려야 할 것의 양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갑자기 반성 모드에 접어들며 이번 이사를 마치면 기필코 미니멀리스트가 되리라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 같은 실수를 반복하리라는 걸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리고 사실은 내 친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중고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사를 준비 중인 친구를 통해서였다. 이사할 때 짐이 될게 뻔한 책들을 미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생처음 온라인 서점에 중고책을 판매했다는 경험담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중고 거래는 주거 환경 개선과 용돈 벌이라는 개인적인 측면은 물론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제법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친구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방 한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펴보지도 않은 자기 계발서들을 한데 모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읽지 않은 책들을 갑자기 읽고 싶어질 확률은 사실상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있던 책들을 양지로 옮기는 업무를 재빨리 마치고 나는 뿌듯한 얼굴로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책장을 훑어보니 어라? 이제는 책장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처분해도 아쉽지 않을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의미다. 대략 이런 사연을 가진 책들이었다. (1) 심혈을 기울여 골랐지만 막상 읽어보니 별로였던 책, (2) 한 번은 읽었으나 두 번은 못 읽겠는 책, (3) 그렇다고 장식용으로 두기에도 성에 차지 않는 책. 어느덧 냉정한 판매자의 관점이 되어 책장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무용한 책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살림살이가 적은 내게도 적지 않은 양을 자랑하는 품목이 있었으니 바로 책과 CD였다. 특히 책에 관해서는 항상 너그러운 구매 기준을 가지고 장바구니를 채웠고 그렇게 몇 년을 지속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책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한때는 취미가 책 읽기라기 보단 책 구매하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책 쇼핑을 즐기던 시절도 있었다. 비록 다 읽진 못했지만 쌓여가는 책을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나게 책을 사다 날랐건만 정작 책장에 두고 싶은 책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내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중고'라는 이름이 덧씌워질 때 매겨지는 가격이 너무나도 낮게 느껴졌고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신간은 더더욱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망설여질 때는 어김없이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읽지 않을 이 책을 팔고 최근 재밌게 읽은 소설을 저렴하게 중고로 구입하면 어떨까?'라고. 대답은 비교적 자명했다.


나는 곧바로 중고책 판매하기에 착수했다. 중고책을 매입하는 예스24와 알라딘에 1차적으로 판매를 하고 매입 불가 상품은 일괄로 당근 마켓에 내놓는 게 2차, 그리고 끝까지 판매가 안 된 책들은 폐기 처분하기로 했다. 책을 판매가 가능한 상품과 불가능한 상품으로 나누고 두 업체 중 어느 쪽에 판매를 할지 결정하고 책을 포장해서 박싱하는 일련의 과정은 따지고 보면 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때 애지중지하던 책들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려 다시 읽힌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수고로움이기도 했다.


맥시멀리스트만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은 일정 기간 맥시멀리스트가 되어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취향이라는 것도 형체를 드러내게 된다. 알고 보면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다 해보고 나니 진심으로 마음이 가는 건 사실 한 웅큼밖에 되지 않았다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취향을 갈고닦았더니 결국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찐애서가들 사이에선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책장이었지만 구입하고 되파는 과정을 통해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풋내기에서 어떤 태도의 글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고민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고 이제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값을 치렀다. 뭐든 배우는 데는 공짜가 없다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앞으로는 효율적인 독서 생활을 위해 도서관을 적극 이용해볼 생각이다. 내 손으로 구매한 책들의 생존율이 얼마나 낮은지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대여한 책을 읽어본 뒤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거나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만 구입하는 쪽이 소비 측면에서도 종이를 낭비하는 않는 차원에서도 아무래도 낫다. 이러다가 또 물욕이 발동하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일단 장바구니에 쓸어 담고 보겠지만 당분간은 가능하면 자제심을 발휘해볼 생각이다.


남들은 집콕 생활을 하며 400번 휘저어 달고나 커피를 만든다는데 나는 지난 주말 동안 책의 바코드를 찍어 판매가를 확인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내게 무용한 것들을 정리하는, 무용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책을 판매한 대금이 들어오면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중고로 살까 고민 중이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어쩌면 애초에 글러먹었는지도 모르겠다.



Cover photo by Patrick Brinksm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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