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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pr 13. 2020

아름다운 것들이 구하는 세상

저는 좋아하는 꽃집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좋아하는 음식점도, 자주 가는 카페도 아니고 꽃집이 웬 말이람 싶지만 저에게는 그런 가게가 한 곳 있습니다. 그곳에서 꽃다발을 예약하고 싶을 땐 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용건을 밝히면 저쪽에선 곧바로 능숙하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예산 이야기를 시작으로 꽃을 선물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선물 받는 사람의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주로 썼으면 하는 컬러는 어떤 계열인지, 선호하는 꽃다발의 느낌(작거나 풍성한 혹은 화려한)을 차례로 묻고 마지막으로 픽업 시간을 대답하는 것으로 이 짤막한 질의응답은 마무리됩니다. 아르바이트생 혹은 주인아주머니가 빠른 손놀림으로 저의 대답을 주문서에 적어내려 가죠. 꽃을 주문하는데 뭐 저런 것까지 알아야 되나.. 싶지만 듣고 보면 이건 정말 필요한 정보니까요.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요구하는 꽃집이라니 벌써부터 좋아지려는 마음이 스멀스멀 샘솟지 않나요?


어떤 가게를 좋아하게 되기 까진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일단 제품이 만족스러워야 할 테고 가격이 합당해야 할 것입니다. 제품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다시 그곳을 방문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질 테고 설령 만족스러운 품질을 뽐낼지라도 서로 생각하는 가격이 맞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자주 찾기가 힘들어지니까요. 제가 이 꽃집을 좋아했던 이유는 (당연히)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플로리스트의 솜씨가 무척 좋았고 주변의 다른 가게에 비해 가격이 무척 합리적이었어요. 중년의 플로리스트는 요청에 따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컬러 구성이나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꽃다발들을 정말 기계처럼 아름답게 뽑아냈습니다. 이 가게는 무척 싱싱한 여러 종류의 꽃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곳이 바로 동네 제일의 꽃집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전율이 그렇게 좋으니 종류도 많고 싱싱할 수밖에요. 마더스 데이 같은 날에는 가게 앞에 잠깐 주차를 하고 꽃을 픽업하러 가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줄을 이었습니다.


직접 가서 주문하는 날은 좀 더 이것저것을 요구해보기도 합니다. 엇, 저기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신기한 꽃이 있네? 이 꽃은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 선택한 것에 맞춰 어울리는 것들을 슥슥 대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좋다고, 예쁘다고 몇 차례 손뼉을 치며 쿵짝쿵짝하다 보면 어느 순간 꽃다발 완성. 보통 35불에서 70불 정도 예산을 잡지만 어떤 때는 20불 정도로 낮게 잡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도 꽃집에선 항상 같은 질문ㅡ작게 해 줄까 아니면 풍성한 느낌으로?ㅡ을 던졌고 20불이라기엔 제법 풍성한 꽃다발을 제 품에 안겨주곤 했습니다. 친구들의 승진이나 생일 같이 무언가를 축하할 날이나 집들이 혹은 그냥 초대를 받은 날에도 이 가게의 꽃다발은 항상 제 몫을 충실히 해냈죠.


꽃다발이 누군가의 기분을 (정말로)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 가게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제게 꽃다발이라 함은 튤립이나 장미를 메인으로 빈틈을 메우는 안개꽃이 들어간 꽃 뭉텅이를 의미했습니다. 여기에 바이올렛이나 핑크 같은 파스텔 톤의 습자지에 투명지로 감싼 형태요. 네, 우리가 흔히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 보던 명목상의 꽃다발들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꽃을 구입한다는 건 무척이나 뚜렷한 목적성을 띄고 있는 일이더군요. 아름다운 꽃다발을 볼 때면 주는 사람도 그걸 받는 사람도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선물용 꽃다발의 꽃말은 '지금 당장 네 기분을 좋게 해 주겠어' 아닐까요.


이렇게 꽃 주문에 심취했던 저는 다소 무리한 시도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바로 한국에 있는 모부의 기념일에 맞춰 꽃을 주문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예전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모부도 꽃 선물에 돈 쓰는 것을 가장 아까워하셨던 분들인데 그건 (추측컨데) 정말로 아름다운, 그러니까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꽃집 검색에 착수했고 리스트에서 몇몇 꽃집을 추렸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유명한 꽃집들은 종로나 마포 같은 서울 중심가에 위치했고 이는 다른 말로 저희 집까지 거리가 꽤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요? 배달과 퀵 서비스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이메일로 문의를 넣었습니다. 이러이러한 꽃다발을 원하고 배달지는 이곳입니다,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하고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꽃다발 제작은 가능하지만 댁까지 퀵으로 보내면 아무래도 배달 비용이 꽃 값을 초과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다시 한번 재고해보심이..' 같은 친절하고도 친절한 뉘앙스의 이메일이 도착한 거지요. 이미 1차 고심을 거친 후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주문을 할까 하다가 꽃집의 조언을 새겨듣기로 하고 저는 대신 용돈 박스를 보내기로 합니다. 결과는 물론 대성공. 모부는 흡족한 마음을 길고 이모티콘 가득한 카톡 메시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아마 그동안 받은 메시지 중 가장 길었던 것 같네요. 이 자리를 빌려 무지렁이 같은 제가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연희동의 초콜릿코스모스와 서촌의 꽃마담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꽃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다가 더 가까운 동네로 이사하게 된 저는 또 이런 (무리한)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 나를 위해 1~2주에 한 번씩 나 자신에게 꽃을 선물하자. 계절에 맞는 미니어처 꽃다발을 거실에 놓으면 그걸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겠지. 유레카!'라고요. 하지만 양 손 무겁게 장을 보고 갈 때면 꽃집을 들르기는커녕 일 초라도 빨리 집에 도착하고 싶었고 그동안 써본 적 없는 돈을 매달 고정비로 쓰려니 왠지 쉽사리 지갑을 열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 때 경기장 주변 꽃가게의 매상이 올랐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시상식용 꽃을 근처에서 구매하기 때문인가? 기사 제목을 보고서 혼자 이런저런 짐작을 했는데 이유는 의외였다. 외국에서 온 선수들이 숙소 방에 둘 꽃을 사기 때문이란다. - 책 <평일도 인생이니까> 中


누군가를 만나기가 무척 조심스러운 시기입니다. 일전에 이사를 계획하고 있던 친구는 어느새 3월 말에 이사를 마쳤습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이사는 잘 마쳤나 싶어 연락을 했더니 '이제 정리 다 됐는데 올래..? 집들이 하기에 지금은 타이밍이 좀 그런가. 여럿이 보는 거 아니니 괜찮을 것도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같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친구 집을 방문하기로 날짜를 잡았습니다. 두 달 만에 친구를 만나려니 설레는 마음에 집들이 선물을 열심히 골랐습니다. 그리고 바깥에 나가기도 뭐하니 디저트를 사 갈까 하다가 불현듯 꽃다발이 떠올랐지요. 마침 친구의 집에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음에 드는 꽃집을 발견할 수 있었고요. 마음이 팍팍한 요즘이야 말로 꽃 선물이 제격인 시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안타깝게도 친구의 재택근무는 이번 주로 종료되었지만 제가 선물한 자그마한 꽃다발이 아침, 저녁으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빛을 발하기를 나아가 여러모로 저보다 나은 제 친구는 집 근처에 있는 꽃 가게를 유용하게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세상을 구하니까요.




Cover photo on Tin Can Stu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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