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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y 01. 2020

일 년에 한 번은 볼로네제 스파게티

세상에는 쉬운 요리와 어려운 요리, 두 종류의 요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메뉴의 난이도를 떠나 적은 양을 만들어 내는 건 생각보다 고급 기술을 요하기도 한다. 짧은 기간을 1인 가구로 살며 깨닫게 된 한 가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인분을 요리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풋내기가 처음으로 주방에 설 때 대체로 참고하게 되는 건 인터넷상에 떠도는 레시피인데 이 레시피란 녀석들은 대부분 2~3인분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라면 한 개를 끓일 때는 봉지 뒷면에 있는 조리 방법에 따라 물 500ml를 넣어 분말 스프 한 개를 통째로 넣으면 되지만 라면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들어가는 물의 양과 스프의 개수가 비례하지 않듯 레시피에 나온 2인분을 1인분으로 축소할 때도 재료의 양은 정확하게 반이 되는 게 아니라 미묘한 비율로 줄어든다. 게다가 1인분이란 실제로 얼마나 적은지. 된장찌개 1인분을 끓일 때 들어가는 물의 양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닿을 것만 같았고 여기에 된장을 넣고 바글바글 끓일 때면 줄어드는 국물을 보며 내 마음도 함께 쪼그라들곤 했다.


무엇보다 1인분을 요리하는 건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아웃풋이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먹고 치우면 어느새 다음 끼니때가 돌아왔고 그렇게 몇 차례 기운만 빼고 보람 없는 상황을 맛 본 후 내가 떠올린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숟가락 얹기'. 일 인분을 요리하던 이 인분을 요리하던 어차피 준비하는 재료의 가짓수와 조리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하는 김에 약간의 재료만 더한 뒤 말 그대로 숟가락만 얹으면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해도 될 일이었다. 아니면 분명 내일 요리하기 귀찮을 '미래의 나'를 위해 조금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레 2~3인분 요리하는 것을 기본값으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2~3인분으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요리가 있다. 우리고 우려먹는 곰탕 같은 메뉴는 1인 가구로써 애초에 엄두도 안 냈지만 내겐 볼로네제 파스타가 곰탕과 같은 영역에 속했다. 토마토소스를 베이스로 한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좋은 핑계가 있긴 하지만 볼로네제 파스타는 슬로우 쿡 스타일로 조리 시간이 무척 길고 품이 많이 드는 요리다. 짧게는 두 시간에서 길게는 여섯 시간까지. 소스를 오래 끓인다는 건 다른 말로 적은 양을 요리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많은 양의 재료를 한솥에 넣어 오랜 시간 동안 끓여 깊은 맛을 내는 게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볼로네제 레시피가 대부분 6인분을 기본으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스타도 알고 보면 그저 (이탈리아식) 국수 요리란 말이 있다. 주말에 번거롭게 국과 반찬을 차리는 것보다 집에 있는 재료에 양념을 넣어 뚝딱 만드는 국수 요리처럼 냉장고 털이용 재료로 후다닥 만들어 후루룩 한 끼를 해치우는 게 집 파스타의 미덕 이건만 볼로네제 스파게티는 여러모로 이 수식어를 비껴나간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서양에선 온 가족이 모인 주말에나 등장하는 게 볼로네제 스파게티다.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의 파스타 사랑은 멈출 줄을 몰라 시간이 날 때면 손에 잡히는 재료로 요리해 한 끼를 때우곤 했다. 최애 메뉴인 오일 파스타는 최근에 너무 자주 해 먹었고 크림 파스타는 얼마 전에 대량으로 만들어 먹었던 탓에 본의 아니게 크림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던 요즘, 불현듯 볼로네제 파스타가 떠올랐다. 모부와 함께 살고 있는 요즘이라면 6인분을 해도 괜찮을 테고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을 위해서라면 시간을 들여 익숙지 않은 요리에 도전해볼 용기도 났다. 누구나 일 년쯤에 한 번은 안 하던 짓이 하고 싶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오늘이 아무래도 그날인가 싶었다. 일 년에 한 번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드는 날.



볼로네제 소스의 위엄 © feelgoodfoodie.net

레시피를 보며 장 볼 것들을 추려 동네 대형 마트로 향했다. 소고기 다짐육과 베이컨, 월계수 잎을 장바구니에 담고 좋아하지 않는 샐러리는 과감히 빼기로 했다. 집 파스타의 묘미는 '좋아하는 건 많이, 싫어하는 건 적게'니까. 집으로 돌아와 부지런히 양파와 당근을 썰었다. 탕탕탕- 하고 도마와 칼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생각만큼 조리 과정이 복잡하진 않았다. 대부분의 재료들을 썰고 볶아서 토마토를 넣은 후에는 약불로 오랜 시간 푸욱 끓인다. 4~6시간짜리가 아닌 퀵 버전으로 30분 프렙 하고 1시간 30분을 끓였다. 오리지널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어영부영 두 시간이 소요된다. 소스가 꾸덕해지면 준비된 그릇에 스파게티 면을 먼저 담고 그 위에 그득하게 소스를 얹는다. "딸 덕분에 이런 음식을 다 먹어보네. 잘 먹을게~!"라고 엄마가 이야기하셨다. 외국 음식이라면 경계부터 하는 아빠랑 다르게 엄마는 평생 요리를 해오신 탓인지 경계보단 호기심이 크고 입맛이 까다롭지 않으셔서 내가 만든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게 드신다. 평생을 우리 집 요리사로 지내온 엄마는 게스트의 역할도 훌륭히 해내신다. 호스트로써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다섯 개를 드리고 싶은 손님이다.


특별히 맛없기도, 그렇다고 특별히 맛있기는 더 힘든 볼로네제 파스타에선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맛이 났다. 일 년에 한 번쯤 생각나는 그런 맛. 접시를 가득 채워 1.5인분을 먹고 나니 당분간(아마 일 년쯤)은 생각이 안 나겠다 싶어 오랜 방학 숙제를 하나 해치운 기분이 들었다. 솥단지로 끓이는 요리에 자신감이 붙어 다음에는 오랜만에 카레를 만들어 볼까 궁리해본다. 모처럼 갓 조리된 카레도 맛보고 다음 날에는 본격적으로 '어제의 카레'를 돈가스와 함께 먹어도 맛있을 것이다. 볼로네제처럼 일 년에 한 번쯤은 카레를 만들고 싶은 날도 있기 마련이니까.




Cover Photo by Mae Mu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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