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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Dec 26. 2018

퍼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Rottnest Island

호주에서 10월 노동절은 혹독한 겨울의 종료를 의미한다. 뜨끈한 온돌방 대신 라디에이터로 나는 겨울은 체감 온도가 낮았고 유독 겨울에 퍼블릭 홀리데이가 없다는 사실은 마음에 허전함을 더했다. 시드니가 속한 뉴 사우스 웨일즈주를 기준으로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6월 퀸즈 벌스데이가 지나면 10월 노동절까지 거짓말처럼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호주에서 첫겨울을 맞으며 그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달력을 펼쳐 공휴일을 세어본 적이 있다. 빨간 숫자는 총 9일로 열 손가락을 채 채우지 못했다. 순간 도끼날같이 매서운 찬바람이 직장인의 가슴을 뻥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퇴근하고 뭐라도 해볼까 궁리를 하다가도 바깥에 나가 새까만 밤을 마주할 때면 의지가 꺾이곤 했다. 그렇게 긴긴 겨울을 지나 마침내 10월이 되면 자연스레 모두의 마음이 살짝 들뜨기 마련이었다. 10월 노동절과 함께 썸머 타임이 시작되면 땡땡땡, 드디어 겨울이 끝나고 저 멀리서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난 30여 년 간 나는 스스로를 겨울형 인간으로 구분 지었다. 여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을 때면 '해가 길어서 늦게까지 놀아도 마음이 편해서'와 같은 구체적인 이유가 돌아왔지만 습하고 더운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한국의 겨울을 좋아했다. 한여름에는 집 밖을 나가는 것만으로도 연료가 소진되는 기분이었고 동남아 여행을 갈 때면 중간중간 반드시 카페를 방문해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다. 이쯤되면 나는 그냥 더위에 취약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내가 호주에 살면서 여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건조한 기후 탓에 기온이 40도나 되는 한여름에도 그늘에 있으면 별로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여름이 힘들지 않았다. 호주의 크고 작은 비치들을 다니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노릇노릇 굽다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시원한 바다에 뛰어들 때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잊혀졌다. 여름엔 비치타월 하나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었다.


여러모로 기쁜 10월 노동절에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를 다녀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퍼스 시내에서 출발하는 페리는 리조트나 캠핑장을 찾는 가족 단위의 장기 투숙객과 우리처럼 데이 투어로 놀러 오는 사람들을 아침부터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한꺼번에 우르르 많은 사람들을 쏟아낸 페리는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고 와글와글 항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금방 각자의 여행길을 떠났다. 페리에서 내린 우리도 보호장비를 착용한 후에 자전거를 타고 곧장 로트 네스트 섬 탐방에 나섰다. 캐러반이 모여있는 캠핑장에는 임시로 만들어놓은 빨랫줄이 나무 사이로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비치타월과 웨트수트, 수영복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장기 여행객의 임시 거처는 일상과 여행 어드매의 광경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낯선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걸어 다닐 때만큼 사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속도로 나아갔다. 평균 10km의 속도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근사한 바다를 보며 감탄하다가 다 같이 페달을 구르던 발을 멈췄다. 도로 위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그 귀여운 생명체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쿼카였다.


나는 서둘러 카메라를 꺼냈고 이브 언니는 타고 있던 자전거를 내동댕이치고 생애 처음 만난 쿼카와 인사하기 바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 -웃고 있는 듯한 얼굴 때문에 SNS에는 항상 이와 같은 설명이 덧붙여졌다.-쿼카의 생김새는 통통한 미니어처 왈라비에 가까웠다. 꺅꺅 거리며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뒤에야 우리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섬 탐방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수십 마리의 쿼카를 더 만났다. 그들의 존재는 이미 자연스럽게 풍경에 스며들어 도로 위에서 마주쳐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가던 차들은 서서히 속도를 낮췄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거나 눈길을 한 번 주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로트 네스트 아일랜드는 분명 관광지였지만 안락하고 안전한 그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섬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슬슬 돌아갈 때가 되어 선착장 근처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더운 날씨에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탔더니 갈증이 느껴져 편의점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순간 정체 모를 표지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쿼카 입장 금지 표지판쯤으로 불러야 할까, 난생처음 보는 사인을 보고 우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말에 나들이 나온 쿼카 가족이 우리처럼 목이 말라 음료수라도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갈라치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합니다만 쿼카 씨는 입장이 불가능합니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표지판은 상상 이상으로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쿼카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한다기보다는 혹시 그들이 가게 내부로 진입하려고 하면 막아달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일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가게 주변의 쿼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시드니에서 퍼스까지는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린다. 호주가 아닌 뉴질랜드나 뉴칼레도니아, 피지보다 더 먼 거리고 시차도 3시간이나 난다. 가까운 곳을 제쳐두고 굳이 퍼스를, 퍼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퍼스에 로트네스트라는 섬이 있어요. 페리는 퍼스 시내와 프리멘틀 두 곳에서 출발하는데 데이 투어로도 갈 수 있지만 가능하면 몇 일을 두고 여유롭게 묵어도 좋은 곳이죠. 물론 캠핑장도 있어요. 자전거를 대여해서 둘러보기 좋은 작은 섬이라 어딜 가도 예쁜 바다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말이에요. 거기에 쿼카라는 동물이 있답니다. 쿼카 아시죠? 페이스북에서 사진으로 보셨던 바로 그 쿼카가 맞아요. 네, 사진만큼 정말 귀엽습니다, 라고.



(*) <퍼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라오스에 대해 뭐가 있는데요?>을 인용한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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