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nald Jun 30. 2020

가방은 무겁고 마음은 가벼운 여행

양양 1박 2일 여행

카메라와 책은 의외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 무겁다. 둘, 부피가 크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어떨까? 여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러기지 안에는 커다란 비치타월을 넣을 틈새가 좀처럼 보이질 않고 게다가 한 손으로 들기엔 제법 무겁기까지 하다. 어랏, 이게 아닌데?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에는 이렇게 짐스럽고 무게 나가는 가방을 들고 1박 2일로 양양에 다녀왔다.



우동 먹으러 휴게소 들르는 사람. 우동에 진심인 편.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속초. 속초 하면 물회!

여행의 동행으로 두 권의 책을 챙겼다. 서보 머그더의 소설 <도어>와 김금희 작가의 에세이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 한 권은 읽고 있던 책이니 그렇다 쳐도 1박 2일 여행 가는데 두 권은 좀 무리 아닌가요? 혹시 엄청난 속독가이신가요? 라고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 속독가는 커녕 책 읽는 속도는 거북이처럼 느으으으리이이-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힘닿는데 까지 여러 종류의 책을 챙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비 오는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져온 소설 한 챕터를 읽으면 딱일 것 같아서 혹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어제의 의지는 다 어디로 갔는지 만사가 귀찮고..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선베드에 누워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 같은, 불시의 상황에 대한 준비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행 뽐뿌로 갑자기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이 읽고 싶어 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까. 여행지에서 딱 필요한 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쾌감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비록 그게 몇 페이지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략)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 <행복의 기원> / 서은국 저

그러니까 어떤 여행에서는 이런 문장을 만나기도 했다. 고생한 보람 없이 여행지에서 책은커녕 글자 하나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그렇다, 들고 간 책을 그대로 들고 오는 불상사도 종종 발생한다.) 이러니 포기가 안 될 수밖에. 행복은 아이스크림과도 같으니, 녹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 말고 다음 아이스크림을 찾아 모험을 떠납시다- 같은 교훈적 모먼트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어떻습니까, 책과 함께 떠나고 싶어 지지 않나요?


수영장 러버

그리고 '가장 좋은 카메라는 아이폰이다'라는 말에 나는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되었다. 몇 년 새에 인물 모드, 야경 모드 같은 눈에 띄는 기능이 뒷받침된 게 큰 이유일 테지만 아이폰이 어떤 카메라보다 작고 가벼우며 업로드도 쉽지만 카메라 기능도 두루 갖췄다는 사실에 이제는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곤드레 밥을 처음 먹어보고 곤드레 밥과 사랑에 빠졌단 뻔한 스토리. 흔한 결말. @양양 흥부네밥상

몇 년 전에 난생처음 휴양지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외딴섬에서 할 일이 없어 지루하면 어쩌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났는데 휴양지라는, 새로운 세상에 뒤늦게 눈을 뜬 나는 노느라 정신이 팔려 가져 간 DSLR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고 돌아오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나는 더 이상 사서 고생하지 않겠다며 한동안 카메라를 두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몸이 편한 여행은 다녀오면 늘 후회가 남았다. 카메라 롤을 훑어보며 이 사진은 카메라로 찍었다면 훨씬 근사 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결국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니까 넉넉하게 여러 권의 책을 챙기고 무거운 카메라를 챙겨가는 건 가져간 것들을 모조리 해치우겠단 굳은 결심이나 매 순간 근사한 사진을 찍어내겠다는 불타는 의지가 아니다. 그보단 그저 읽고 싶은 것이 손 닿는 곳에 있고 필요한 순간에 카메라를 꺼내 들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방은 무거울지언정 오히려 이쪽이 마음은 가볍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고라면 기꺼이 감수하고 싶다.


1박 2일 동안 네 군데의 비치를 돌며 끼니때가 되면 리스트에 올려둔 음식점에 찾아가느라 속초와 양양을 수시로 오갔다. 게다가 오랜만에 들어간 수영장은 어찌나 좋던지. 2월 이후로 수영장 근처에도 못 가본 나는 아침 수영을 하다가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가져간 책은 한 번도 들춰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빙빙 돌려서 한다. 이럴 거였으면 어떤 책을 가져갈까 왜 때문에 그렇게 고심을 했는지 과거의 나를 비웃고 싶어 지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러 장의 사진이 남았으니 절반은 성공한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닌가요?




작가의 이전글 6월의 어느 좋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