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안 하면 취업 못 한다고요?
물론 온라인 강의를 들은 1년 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 정확히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다 보니 평소 내가 하는 일의 2배를 동시에 수행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번아웃도 항상 함께였다. 거의 2달 주기로 번아웃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이렇게만 말한다면 혹자는 내 에너지의 총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 질책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번아웃이 온 순간 하고 있던 일을 세어보니 총 11개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상을 영위하는 데 부담을 느낀 나는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아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담사는 나에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긴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하며, 그렇지 않은 일들은 과감히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특히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OO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요즘 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트렌드가 자꾸 나와요. 진정으로 내가 추구하고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11개의 일이 모두 중요하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개발자가 인기를 끈다는 뉴스를 보고 개발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주식 투자 붐이 일면서 처음으로 주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이 아는 만큼, 그리고 실행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이번 휴가는 달로 떠나려고 해”라고 말하지 않듯, 불가능한 일은 아예 인식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저 눈앞의 뉴스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목소리에 휘둘리기 일쑤였다. 특히 코로나 시기에는 직접 만나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내뱉는 주장이 마치 법처럼 들렸다. 개발을 하지 않으면 취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주식이든 뭐든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할 것 같았고, 결국 실패한 인생을 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익명의 목소리에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견에 동의하는 댓글이 10개만 있어도 그 생각이 마치 세상의 주류인 것 같고, 트렌드를 다룬 기사 하나만 봐도 내가 시대에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개발자’도,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학생 창업’도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난 무엇을 좋아하며, 그것을 왜 좋아할까?”라는 끊임없는 자문을 시작했다.
먼저, 나는 다양한 주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큰 만족감을 느낀다. 이는 리서치와 분석을 통해 어떤 상황이나 개념의 본질을 파악할 때 오는 성취감 때문이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며,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사고방식을 새롭게 전환할 때의 희열은 나를 더 깊이 공부하고 탐구하게 만든다. 그래서 유저 경험을 연구하고 개선하는 과정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고, 이 작업을 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전혀 아깝지 않다.
또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글은 영상과는 달리 상상의 여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는 편집 방향부터 장면을 담아내는 구도까지 모두 제작자에 의해 정해진다. 아주 사소한 소품의 모양과 색마저도 그가 정해준 대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은 삽화가 많이 첨부되어 있는 동화책이 아닌 이상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펼쳐진다. 이 점에서 글을 읽을 때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고, 그 결과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매일 자문하며 살면서도 내가 트렌드에서 벗어났을 때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한 답은 명확히 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함부로 정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이 걸리지 않는다. 2~3년이면 전 세계가 180도로 뒤바뀌는 시대에 왜 개인이 변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닫아두어야 하는 걸까?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2024년에 만든 감옥에 가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일 새로운 감옥을 짓고 허물며 살고 싶지 않다. 그저 푸르른 들판에서 뛰놀고 싶을 뿐이다.
또한 우리는 결국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에 시류의 목소리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실체 없는 온라인의 소리일지라도, 온라인에서 힘을 얻게 되는 순간 그 소리는 마케팅, 브랜딩, 그리고 자본이라는 현실의 몸을 얻기 때문이다. 특히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의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는 인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오늘날 ‘나’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우리 자신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소 일관성 있는 스토리를 이루고 있는 타인을 합쳐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은 개인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 이에 나는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지도, 해서도 안 되는 뚜렷한 경계를 그리기보다는 매일 세상과 나에게 적당한 관심을 주면서 살고 있다. 뉴스 기사를 주 2-3회씩 보면서 인상적인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하고, 비정기적으로 일기와 글을 쓰며 나에 대한 관념을 재정비한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최선의 삶을 살고 있지 않나.
꼭 "다들 하고 있다"라고 뉴스에서 말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만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야. 성공은 타인이 정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정의하는 성공이 없다면 매일 실패한 삶을 살게 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