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은 계획표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고, 물은 하루 2리터, 걸음 수는 만 보.
생활이 단정하면 마음도 정돈된다고 믿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이연이, 계획 없이 걷고 있었다.
인턴을 끝냈지만 다음 스텝을 정하지 못한 채 벌써 사흘째.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 목적 없는 하루.
하루 두 끼, 폰 속 뉴스, 시계 보기.
자기 앞의 시간이 텅 빈 만큼, 머릿속은 묘하게 시끄러웠다.
“내가 이렇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서울의 8월은 뜨겁다 못해 뭉툭했다.
후덥지근한 공기는 피부에 감기고, 콘크리트 바닥은 햇빛을 머금은 채 열을 토해냈다.
사람의 체온이 사랑을 밀어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땀이 닿을까 어깨를 떼게 되는 계절.
애정을 퍼붓기에도, 위로를 건네기에도 찝찝한 여름이었다.
이연은 그 여름 속에서 헤메다 석촌호수에 이르렀다.
석촌호수는 여름을 가두지 못한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햇빛을 피해 걷는 사람들, 벤치마다 늘어진 몸들.
호수 위로는 햇빛이 쨍하게 반사됐고, 누군가는 그 물빛에 눈을 가렸다.
사람들, 시간들 틈에 섞이지 못한 이연은 자연스레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무심코, 호숫가와 이어진 낮은 울타리 한편, 작은 수풀 사이에 나 있는 틈을 발견했다. 대부분은 자칫 물에 빠질까 걱정해 시선도 주지않는 공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칡덩굴 아래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여긴 뭐지?”
이연은 문고리를 조심스레 잡았다.
손끝에 닿은 감촉은 낡았지만, 의외로 견고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삐걱—
오래된 경첩이 조용히 울음을 토했다.
그 문 너머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좁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마치 지하철 승강장 사이,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살짝 어긋난 공간 같았다.
통로 끝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낡은 벽돌, 검게 변한 철제 난간.
그리고 계단 위에는 손바닥만 한 나무 간판 하나가 어두움을 밝히는 전구처럼 걸려 있었다.
거친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토끼굴 책방』
― 책도, 사람도 쉬어가는 곳 ―
“책방…?”
호숫가 한복판, 수풀 아래, 지하로 들어가는 책방.
이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호수의 그림자를 문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어쩐지, 정말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끌렸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공간을 자신만 발견한 것 같은, 비밀을 공유하게 된 기분이었다.
이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나무문 하나.
문을 밀자, 조용히 나무끼리 스치는 마찰음이 났다.
책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책 냄새, 나무 냄새, 호수의 물내음.
오래된 먼지와 은은한 커피 향이 뒤섞여, 엎드려 울고 있는 나무를 포근히 안아주는 듯한 공기가 천천히 퍼졌다.
천장에는 조명이 아닌 스탠드형 전등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곳곳에는 오래된 소파와 낮은 탁자가 보였다.
책장은 벽면 가득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가운데엔 둥글고 낮은 테이블과 두세 개의 의자.
그 틈에서,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흰 셔츠에 회색 조끼를 입은 모습.
시간보다 오래된 사람처럼 보였다.
“어서 와요. 오래 산 책도, 오래된 사람도 반기는 곳이에요.”
“…안녕하세요.”
“어떤 이야기 필요해요? 오늘 하루를 버틸 만한 이야기? 아니면, 오래 미뤄온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이야기?”
“…그냥, 둘 다요.”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저 없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커버가 누렇게 바랜 책. 제목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거요. 오늘은 이 책이 당신 차례래요.”
“네?”
“책도 사람을 기다려요. 자기가 필요할 사람을요.”
처음 보는 책이었지만, 연은 아무 말 없이 받았다.
마치 오늘 해야 할 일이 이것뿐인 것처럼.
조용히 책장을 넘기려다가, 문득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혹시, 여기서 일할 사람 필요하세요?”
인턴을 마치고 백수가 된 지 3일째.
뭔가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너무 많은 걸 하고 싶진 않았다.
단지… 이 공간에서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노인은 조용히 웃었다.
“여기 책방은 손님도, 일하는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에요.
하루 종일 있어도 좋아요. 책 한 권 읽고 가도 좋고, 다음 사람을 기다리는 일도 좋아요.”
그 말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여름 햇살이 도시를 누르고 있었지만,
이 지하 책방 안에서는 계절도, 시간도 느긋하게 흘렀다.
그날 이후로, 이연은 매일 한 권씩, 누군가의 삶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