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이번 학기부터 석사를 시작하게 되며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는 이제 대화가 제법 잘 통하는 수준이 되어서 함께하는 시간이 한결 편해졌다. 또 워낙 장난기와 웃음도 많은 편이라 그 시간이 제법 재미도 있다.
물론 육아의 매 순간이 순탄하진 않다. 아이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나 호기심이 강하다. 아마도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냐, 내가 할래"이지 싶다. 모든 걸 자기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물을 일부러 바닥에 좀 붓고서는 "안 돼!"라는 나의 말을 들으면, 나를 응시하며 남은 물을 모두 바닥에 부어 부리는 아이(...) 내 눈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아이를 보면, 무섭게 주의를 주려다가도 몸에 힘이 빠져 그냥 헛웃음이 나온다.
어제 저녁도 나와 아이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던 그런 와중이었다. 벗 한 분께서 찬양 한 곡을 나누고 싶다며 링크를 보내주었다. 찬양을 들으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본래 눈물이 많은 편이다 보니, 어제도 기도를 하다 보니 마음의 감격으로 눈물도 한 두 방울 난 모양이다. 그때, 아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 울지 마.. 내가 미안해.
그 작은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 준다. 그리고는 볼에 뽀뽀도 해주고 포옹도 해 준다. 아이야, 네가 뭐가 미안하니. 미안하단 말의 뜻은 알고 그러니. 이 조그마한 손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거니. 그 모습이 너무 어여뻐서, 나는 감동에 젖은 촉촉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는 울지 말라며 나를 위로하기를 반복. 그렇게 눈물과 위로로 십여 분을 함께 보냈다.
만 두 살 반이 채 안 된 아이는 어쩌다 내게 저런 말을 해 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전에 내가 아이를 미숙하게 감정적으로 혼내고 나서는 미안하다고 달래고, 꼬옥 안아주고,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적이 있지 싶다. 그렇다 해도 아이에게서 위로의 포옹을 받는 일은 참 감격스러웠다. 벌써 이렇게 컸나 싶기도 했고, 나의 연약함을 아이에게 조금은 비춰 내보일 수 있을 먼 훗날이 기대되기도 했다.
종종 선후배나 동료, 또는 친구들이 육아에 대해 물어온다. 주로 아직 육아 경험이 없어서 궁금함이 한 가득인 경우다. 박사과정과 병행할만한지, 뭐가 제일 힘든지, 또는 행복한지.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겨우 알아가는 중이지만, 뭐가 좋고 나쁘다기보다는 그냥 풍성해지는 것 같아, 삶이."
육아라는 게 내게는 참 그렇다. 삶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 마냥 좋은 것들로 가득한 것도 아니지만 힘든 순간들만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려움도 배가 되고 행복도 배가 된다. 그 기쁨과 고난 속에서 삶의 의미 또한 깊어지고 폭넓어진다. 달리 말하면 나에게 육아란 삶의 모든 면을 풍성케 만드는 증폭제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어제 아이가 나의 삶에 남겨준 또 하나의 풍성했던 하루.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부족한 시간을 쪼개 적는 오늘의 되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