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다. 아닌 날도 있고. 그러다 마는 날도 있지.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가끔 이렇게 육아일기 비스무리한 글들을 적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 육아일기의 내용이란 게 편향될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즉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되는 일종의 긍정편향이다. 육아에 관해서는 주로 감사와 행복의 순간을 기록하고자 글을 적게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의도치 않게 육아를 하며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기록에서 종종 간과된다. 육아의 기억도 여느 기억들처럼 미화되곤 하는 것이다.
육아의 매 순간이 즐겁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마다 또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육아란 모름지기 즐겁고 행복한 때보다는 힘들고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더 많을 것이다. 아이 또한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스러운 존재임과 동시에, 세상 무엇보다도 손쉽게 우리의 감정조절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무지막지한 존재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아이 둘을 키우는 지인이 보내준 일러스트가 너무 웃겨서 아내와 같이 보며 큭큭대고 웃었다. 그래 이거지! 싶었달까. 양육자로서 우리네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됐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그려지는 출산과 육아. 그러나 그 이면은 인내로 가득하다. 누군가를 키워낸다는 건 사랑을 전제로 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기꺼이 참고 견뎌낸다는 걸 의미한다.
간혹 육아가 쉽지 않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면 어떤 친구들은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에게 힘들 일이 있냐고 되묻는다. 그 물음도 참 이해가 되는 게, 아이들이란 집 밖에서는 대부분 내숭쟁이다. 밖에서는 우리 딸도 가끔 그렇게 새침하고 얌전할 수가 없다. '집'이라는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부모'라는 가장 만만한 대상과 있을 때 아이들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종강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홀로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어찌나 말을 안 듣고 고집과 떼를 부리는지. 나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화가 날 때는 뭐, 뒤를 돌아서 몇 초 세어보고, 억누르고, 뭐 어쩌고 저쩌고... 육아전문가의 조언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게 맘처럼 늘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온 힘을 다해 청개구리처럼 거부하는 아이가 미웠다. 결국 나는 눈을 부라리고 언성을 높였다. 아이는 엉엉 울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도 나도 속이 많이 상했다. 우는 아이를 붙잡고 양치를 하고, 불을 끄고, 상한 속을 붙들고 각자의 자리에 눕고서도 들리는 아이의 훌쩍거리는 소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절망감. 그래도 부모이고 어른인데 좀 더 참고 인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혼을 냈다는 자책감. 아무래도 난 썩 좋은 부모는 못 되나 보다 싶은 무능감. 속이 쓰렸다.
아이라고 별반 달랐으랴. 아이도 성장하고 있고, 인생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상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투성이인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그러던 차에 기댈 곳이라곤 아빠뿐이어서 떼도 쓰고 울었는데 오늘따라 아빠도 야박하기만 했다. 아이의 좌절감을 헤아려 본다. 본래도 서럽게 우는 편인 아이의 울음은 이날 따라 더욱 서럽게 들렸다.
몇 분을 그렇게 있으니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곤 침대를 가로질러 데굴데굴 구르는 듯하더니, 뒤돌아 누운 나의 등 뒤에 무언가 닿는다. 아이의 등이었다. 나의 등에 닿은 아이의 조그마한 등이 따뜻했다. 우린 그렇게 누운 채로 등을 맞붙였다. 아이는 나와 등을 꼭 붙인 채로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잠이 들었다. 아이가 내쉬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들으며, 나의 등에 전해지는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스르르. 나도 그렇게 잠에 들었다.
두어 주가 지난 지금에 갑자기 그 날의 밤이 떠오른다. 그래, 때로는 이렇게 서로 등을 지면서도 여전히 살을 부비고 온기를 나누는구나. 너와 내가 그렇게 삶을 한데 부비며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또 하나 알았다. 육아에 대한 모든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그냥 저절로 미화되기만 하는 건 아니란 것을. 순간의 분노와 짜증, 화에 매몰되어 놓친 삶의 장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보람과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오늘도 결국 미화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