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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Mar 05. 2020

육아는 행복일까 불행일까

삶이라는 제한된 그릇에 '아이'가 담길 때 


요새 아이는 거의 매일같이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이제 말을 곧잘 하는데 그만큼 자신의 의사도 분명하게 표현한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집에서 놀고 싶다고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아이가 반에서 가장 월령이 높은 편이라 아무래도 지루하기도 할 테고, 당연히 단체생활보다는 어리광을 더 피울 수 있는 부모 품에 더 있고 싶을 테다. 그런 아이를 매일 아침 깨우고, 억지로 둘러업고 나와 차에 태우고, 우느라 쩍 벌어진 입에 젤리를 먹여주며 어르고 달래고,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와 작별인사를 하며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안겨주고 뒤돌아서는 아침의 일과, 참 마음 시린 일이다. 여러 날 동안 반복되어도 쉽사리 적응되거나 무뎌지지 않는, 그때마다 늘 같은 크기로 마음이 아려오는 그런 일이다. 


아이를 오후 5시 반에 픽업하는 날의 경우 집에 와서 이래저래 짐을 풀면 저녁 6시가 된다. 그러면 아이가 잠들 때까지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해봤자 기껏 네 시간 남짓이다. 네 시간 동안 아이는 부모와 함께 저녁을 먹고, TV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든다. 또는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리기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기도 한다. 부모의 손길이 닿는 그 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두배에 달하는 길고 긴 하루를, 가고 싶지 않다고 울음으로 항변하는 시공간에서 견뎌준다고 생각을 하면 입 안이 텁텁하다. 아이에 대한 정말 미안한 마음과, 나쁜 부모가 된듯한 죄책감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다. 다행히도 선생님의 얘기로는 아이는 부모가 시야에서 없어지고 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보통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편이라고.


"이거 봐요!"  오리기를 하고 자랑하는 아이.




내게 육아란 항상 즐겁거나 보람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고작 그 네 시간의 육아가 때로는 힘에 부친다거나 길게 느껴질 때도 더러 있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 일이란, 내가 그로 인해 무언가를 누린다기보다는 책임을 다해내야 하는 일로 느껴진다. 아이는 세상 어느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그러한 사랑스러움에 흠뻑 젖어드는 건 잠깐잠깐의 순간들이다. 그 외의 순간들은 아이의 쉬가 샌 이불을 빤다거나, 요리를 하고 밥을 먹인다거나,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책을 읽어주고, 잠이 들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토닥토닥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식의 일들로 채워진다. 나의 경우 가정 외에서도 직업 영역에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업무 관련된 생각들이 머리를 채울 때면, 아이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내 일을 충분히 못 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주는 행복은 삶의 다른 영역이 주는 어떤 행복과 보람과 성취감보다도 압도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아이와 그렇게 사사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내가 나의 업에서 더 많은 일들을 성취하고 보람을 느끼고자 애쓰는 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일들처럼 여겨지곤 한다.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을 그저 충만하게 누려낸다면 내 삶은 그걸로 충분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런 생각에 이르면, 세상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내 앞의 이 작은 존재만이 내 삶을 채우는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된다. 나의 직업, 성취, 여가,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내게 주어진 다른 역할들은, 나중에 아이가 언젠가 나라는 둥지를 떠나갔을 때, 그때 내 존재가 아예 소멸되지 않도록 준비해 놓아야 하는 최소한의 노후 준비 정도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육아 역시 절대적인 행복이나 불행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육아는 일방향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또는 힘들게 만든다기보다는, 삶에 전방위적으로 진폭과 의미를 더하는 어떤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육아를 좀 더 행복한 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역할들에 대한 책무를 줄이는 용단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내게 주어진 일들의 압박을 덜 느낄 때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즐거워진다. 그럴 때는 아이와의 상호작용에 더욱 집중할 수 있고, 미소, 포옹, 따뜻함과 같은 내가 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줄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내게 주는 것들, 즉 아이의 미소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막무가내로 내지르는 노래와 춤사위 같은 것들을 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슈퍼맨이 아닌 나로서는, 다른 일들에 좀 덜 책임감 있고, 덜 유능해질 때에, 아이의 양육에 대한 나의 책임과 의무를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게 여길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결국 아이의 존재는,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어떤 측면에서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내적 갈등에 직면하도록 한다. 가정과 아이라는 정말 중요한 가치가 생겼다고 해서, 다른 중요한 가치들, 이를테면 직업에서의 성취나 친구와의 우정,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혼자 산책을 하는 시간과 같은 것들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담아야 할 것이 늘어난다고 해서 내 삶의 그릇이 더욱 커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24시간의 굴레에 매여 있고, 저질스러운 체력도 갑자기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는 말과도 같다. 많은 때에 아이를 돌보는 일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일이어서, 자연스럽게 '중요하지만 아이보다는 덜 중요한 다른 무언가'가 희생되어야 할 때도 많아진다. 삶이라는 제한된 그릇에 '아이'가 담길 때,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아이보다 조금은 덜 중요한 삶의 많은 부분들에 소홀해지는 법을 배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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